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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 4색의 영화관(觀), 그 지독한 사랑

<더 킬러스>

조재휘(영화평론가)

헤밍웨이의 단편 소설 <살인자들 The Killers>은 금주법이 시행 중이던 시기의 미국, 시카고 교외의 한적한 동네 서밋에 두 명의 낯선 남자가 나타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식당 주인 조지와 그의 지인 닉, 주방 담당인 요리사 샘은 살인청부업자인 엘과 맥스를 손님으로 받는데, 두 킬러가 노리던 표적은 예상한 장소에 나타나지 않고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은 채 이야기는 끝난다. 이 소설은 고의적으로 설명을 비워 버린 대신, 상황의 표면만을 추적함으로써 독자에게 밝혀지지 않는 인물의 성격과 의도, 전후의 사정에 대한 풍부한 상상, 대안 서사의 여지를 열어 놓는다. 그런 만큼 <살인자들>은 각색하기에 따라 다양한 창작의 방향성이 가능한 소재이며,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도 러시아 국립영화학교 재학 시절, 이 소설로 단편을 찍은 바 있다.

네 명의 연출자의 단편을 엮은
옴니버스 영화 <더 킬러스>의 각 단편 포스터

<더 킬러스>(2024)는 헤밍웨이의 동명 단편과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Nighthawks: 이 그림은 <살인자들> 말고도 헤밍웨이의 또 다른 단편인 <깨끗하고 밝은 곳>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설이 있다)을 모티브 삼아 이명세 감독의 총괄 지휘하에 각기 다른 연출자의 손을 거친 네 편의 단편을 엮은 옴니버스 영화다. 김종관의 <변신>, 노덕의 <업자들>, 장항준의 <모두가 그를 기다린다>, 그리고 이명세의 <무성영화>. 동일한 원전에 바탕하고 있음에도 버트 랭카스터와 에바 가드너 주연의 필름 느와르 <살인자들>(1946), 돈 시겔의 <킬러>(1964)가 원전에 비어 있는 공백을 새로이 창작한 내용의 각색으로 덧댐으로써 장르영화로서의 서사적 완결성을 추구했다면, <더 킬러스>는 킬러의 등장과 손님의 방문(<업자들>을 제외하면), 제한된 한 개의 세트 공간이라는 기본적인 세팅, 그리고 배우 심은경(단, 장항준의 <모두가 그를 기다린다>에서는 배역으로서가 아니라 소품인 ‘선데이서울’의 표지 모델로만 등장)만을 공유할 뿐, 각기 다른 이야기와 연출을 선보이며 전혀 다른 방향성을 띤다.

(조성환의 <인져리 타임>, 윤유경의 <언 땅에 사과나무 심기>가 <더 킬러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만들어졌지만 극장 개봉 버전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향후 VOD, OTT 플랫폼 공개 시 포함될 예정이라고 한다.)

콘셉트만 공유할 뿐 연속성과 일관성을 띠지 않기에 <더 킬러스>에 포함된 네 편을 선명한 하나의 주제의식으로 묶어낼 유기적인 면면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 영화(들)는 동시대 한국영화의 일익(一翼)을 담당한 감독들이 저마다 가진 영화 매체를 바라보는 관점의 다양성, 지향하는 방향성의 차이를 시연하는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이자 모자이크화로 받아들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이 중 <변신>과 <업자들> <모두가 그를 기다린다>는 감독에 따라 서로 다른 결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어떻게 대중적 장르에 접근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셋은 공통된다.

김종관의 <변신> - 장르 영화로의 ‘변신’을 모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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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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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관 감독이 연출한 <변신>

<최악의 하루>(2016), <더 테이블>(2017), <아무도 없는 곳>(2021), 옴니버스 영화 <페르소나>(2019)의 한 에피소드인 <밤을 걷다>와 같은 전작의 경향성, 정물(靜物)적인 공간 속 인물 간 대화에 흐르는 심리의 미세한 결, 감도는 분위기로부터 보여주지 않은 사건과 내밀한 감정선을 환기시키는 멜로드라마의 장인이었던 걸 돌이켜보면, 김종관이 <변신>에서 보여주는 변화는 가장 이질적이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의 대화로 드라마를 진행하는 화술의 바탕은 살아남지만, 폭력과 섹슈얼리티, 탐미적 색채가 두드러지는 미장센과 슬로모션으로 강조되는 액션의 활동사진적 운동감, 흡혈귀 영화의 장치와 구도를 끌어들이는 전시적인 면면은 이전의 필모그래피에서 보지 못했던 점이기 때문이다. 흑백에서 핏빛을 연상시키는 붉은 색조의 컬러로, 일상적 공간이자 현실인 길거리에서 장르적 공간이자 비현실인 칵테일 바로, 현실적인 폭력에서 스타일화한 액션으로, 피해자였던 주인공이 가해자로 바뀌는 등 ‘변신(Metamorphosis)’의 모티브는 영화 전반에 걸쳐 철저히 관철된다. 이 단편은 김종관이 <조제>(2020)에 이어 장르영화의 문법을 다뤄보고자 한 감독으로서의 자기 ‘변신’을 꾀한 도전으로 보인다. 또한 주인공이 왜 얻어맞는지, 왜 흡혈귀가 존재하고 칵테일 바를 운영하는지 등 이야기의 전후 맥락과 설정을 설명하지 않은 여백으로 남기며 상상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변신>은 프로젝트의 동기가 된 <살인자들>의 문학적 효과에 가장 근접해 있다.

노덕의 <업자들> - ‘살인의 외주화’, 한국 사회를 풍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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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덕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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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덕 감독이 연출한 <업자들>

<특종: 량첸 살인기>(2015)에서 조작된 진실을 덮기 위해 더 큰 조작을 일삼게 되는 연쇄반응을 그렸던 노덕은 <업자들>에서 전작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의 부조리한 단면을 장르영화의 구도 안에 능숙히 끌어들인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살인의 외주화’다. 의뢰인이 살인청부를 하며 건넨 거액 3억의 착수금은 위에서 아래, 상부에서 하부조직으로 내려갈수록 대폭 금액이 깎이는데, 중간에서 떼어먹기의 과정을 압축해 담는, 내달리는 듯 경쾌한 편집의 리듬은 블랙코미디다운 유머의 감각을 강화시킨다. 정작 의뢰받은 살인을 실행해야 하는, 가장 위험한 일을 떠맡은 말단에게 돌아가는 건 10만 원 단위이며, 그걸 받는 3인조(선글라스를 낀 이들 셋의 등장과 살해 대상의 이름 이종세는 영락없는 이명세의 데뷔작 <개그맨>(1988)에 대한 오마주다)마저 바닥에 바닥을 찍듯 외국인 노동자에게 살인청부 하청을 떠넘기는 내리물림의 연쇄는 우스꽝스러운 우화(寓話)이면서 현재 한국 사회 곳곳에서 자행되는 씁쓸한 풍경들을 상기시킨다. 서사의 완성도와 영화적 테크닉, 작가적 시선을 고루 갖춘 이 단편은 아이디어를 확장한 장편이 있었으면 하는 모종의 기대를 품게 한다.

장항준의 <모두가 그를 기다린다> - 장르에 깃든 정치적 함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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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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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준 감독이 연출한 <모두가 그를 기다린다>

장항준의 <모두가 그를 기다린다>는 필름 누아르의 장르적 성격에 가장 충실한 한국적 이식이다. 미국의 금주법 시대는 한국의 유신정권 말엽(극 중 라디오 방송에서 삽교천 방조제 준공을 알리는 뉴스가 흘러나오는데, 박정희가 제막식을 마치고 돌아온 그날은 공교롭게도 10·26이었다)으로, 서밋의 식당은 부둣가의 선술집으로 바뀌고, 하나둘씩 킬러들이 도착해 표적이 도착하기로 예정된 시간을 기다린다. 자리에 앉은 이들 중 누가 표적인 염상구(이 이름은 소설 <태백산맥>의 등장인물 중 염상진의 동생인 벌교의 깡패두목을 상기시킨다)인지 정체를 알 수 없어 상대를 의심하는 서스펜스의 축적된 긴장감은 그(그녀)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몰아치는 액션과 함께 일시에 폭발한다. 오이디푸스적 국가 권력의 정점에 있던 대통령이 술을 마시다 피살되던 통금의 밤에 현상금 사냥꾼과 형사, 순경을 위장한 암살자들이 선술집에서 여성 암살자의 손에 몰살당한다는, 시대 배경과 극 중 상황의 선연한 대비는 서사를 위한 길이가 모자란 단편 안에서도 모종의 정치적 함의를 조형해낸다.

이명세의 <무성영화> - 영화, 오로지 영화만을 사랑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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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세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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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세 감독의 <무성영화>

이명세의 <무성영화>는 <더 킬러스>에 수록된 네 편의 단편 중, 형식미학적으로 가장 급진적인 경지를 보여준다. <모두가 그를 기다린다>와 결을 맞추기 위해 10·26을 알리는 자막으로 시작하지만, 곧바로 가상의 도시 디아스포라 시티의 존재를 알리는 자막과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맑게 개어 있던 하늘에는 곧 먹구름이 몰려오고, (폐쇄된 저택 제너두를 비추던 <시민 케인>(1941)의 오프닝을 오마주한) 출입금지 안내판과 철조망은 두 명의 킬러 종세와 도석(소설의 엘과 맥스를 대신한 둘의 이름이 <개그맨>의 그것임은 물론이다)이 통과하는 계단과 난간, 이를 통과하는 빛에 의해 만들어지는 그림자에 의해 마치 감옥의 창살을 방불케 하는 폐쇄적인 인상을 만들어낸다. 밝고 넓고 개방된 공간에서, 어둡고 좁고 폐쇄적인 공간으로 옮겨 가는 이행의 양상. 빛과 어둠, 가상과 현실의 이분법적 대비. 이때 (이명세 영화의 단골 공간이자 핵심 모티브라 할) 계단과 창살, 조명의 이동과 번뜩임에 의해 인물의 운동 이미지가 분절되어 보이게 하는 연출은 정지된 필름 이미지의 연속인 활동사진의 속성에 영화적 활력의 본질이 있다는, <형사 Duelist>(2005)에서 극단에 달했던 영화예술에 대한 감독의 철학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공간과 인물, 기본적인 줄거리는 <살인자들>을 충실하게 옮겼지만 <무성영화>에선 어느 순간부터 이야기의 인상은 흐릿해지고, 오롯이 이미지의 선과 면, 명멸하는 빛과 그림자, 장면의 무브먼트에 반응하듯 맞춰지는 사운드에 의한 ‘어트랙션(Attraction)의 몽타주’(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이 주창한 개념)가 자아내는 효과만이 관객의 뇌리를 채운다. 다시 오프닝으로 돌아가 보자. 문자와 포개지는 창살의 수직적 이미지, 원형의 창문 두 개 너머로 나타나는 종세와 도석(이 이미지는 카세트테이프 구멍에 둘이 비치는 반사 이미지로 다시 반복된다)을 포착하며 원을 그리는 카메라의 회전, 프레임 우측으로 질주하다가 시간을 갖고 놀 듯, 필름을 되감기한 듯 좌측으로 돌아가며 가상의 선을 그리는 수평적 이미지. 연속으로 제시되는 세 이미지는 충돌하는 수직과 수평의 이미지를 원호의 이미지가 포섭하며, 이러한 이미지의 운동과 충돌이 한 화면 안에서나 장면과 장면의 연결을 통해 거듭되면서 관객에게 영영 잊히지 않을 인상을 준다던 에이젠슈테인의 이론을 영상으로 고스란히 옮긴 결과물에 다름 아니다. 이야기는 맥거핀(MacGuffin)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문학적 내러티브가 아니라 이미지를 통해 읽어내야 하는, 어트랙션의 효과 안에 숨겨 둔 메시지에 있다.

현실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고픈

단편이지만 <무성영화>는 이명세 영화의 오랜 팬이라면 반가워할 법한 순간들로 넘쳐난다. 프리즈 프레임과 분절된 슬로모션, 현수막을 달 위치를 두고 다투는 행동이 관객의 시점에서는 춤처럼 보이는 동작의 연출, 무대극처럼 과장된 연기와 말이라기보단 음향효과로 느껴지는 두 킬러의 대사 스타일, 화면에 직접 개입하는 만화의 말풍선과 분할 화면, 전격적인 이중노출과 디졸브의 활용 등 상투성을 거부하고 가능한 모든 표현의 테크닉을 활용하고자 하는 연출 방식에서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1)와 <남자는 괴로워>(1995), 그리고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와 (2007)의 추억을 떠올리지 않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림자를 이용한 연출과 제한된 식당 공간 안에서 서커스를 방불케 하는 무브먼트의 일대 난장을 벌이는 등은 <형사 Duelist>를, 그리고 풍선이 하늘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장면은 김혜수 주연의 <첫사랑>(1993)의 마지막에 실연한 영신이 홀로 남아 엎드려 있는 동안 주변 사물들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장면을 원래는 우주까지 날려 보내는 걸로 만들 작정이었다는 감독의 변을 떠올리게 한다.

식당 주인 스마일(그가 입은 해골 문양 셔츠는 <개그맨>의 문도석이 입은 하와이안 셔츠를 연상케 한다)과 대화하고 있는 동안 두 킬러 중 한 사람인 도석이 한 손에 풍선을 잡고 있는 모습은 앞서 풍선이 하늘 높이 날아가는 장면과 연결 지어 보게 된다. 원작 소설에서의 킬러가 시카고 갱단의 일원으로 추정된다면, <무성영화>의 두 킬러는 ‘새 지도자’와 ‘국민의 단합’을 운운하는 데서 박정희 사후 정권을 쥔 전두환 정권의 공안 관계자라 추정할 수 있는데, 이때 맑은 하늘로 날아가는 풍선이 이상 세계와 자유를 뜻한다면, 식당에 들이닥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종세와 도석은 폭압적인 군사정권으로 표상되는 현실의 암울함을 은유한다. “이곳에 들어온 후론 언제가 낮이고 밤인지 알 수도 없고 빛을 누릴 자격을 영원히 상실한 줄 알았다”던 스마일은 “여기 사람들은 구멍이라 하는”, 칵테일 잔 형상처럼 생긴 하늘이 비치는 창(窓)을 두고 “저에게는 영화관이지예”라 말한다.

이 다음으로 프레임 중앙에 놓인 선샤인의 얼굴이 이중노출을 통해 그늘진 창살의 이미지와 겹쳐져 포위된 듯한 인상이 만들어지면서, <무성영화>를 통해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마침내 분명해진다. 이명세에게 있어 영화란 숨 막힐 듯 답답한 현실에 숨통을 틔워줄 수 있는 창이자 출구, 상상의 이미지를 구현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이상향이며, 시대 배경상 전두환 정권의 끄나풀일 터인 두 킬러는 영화라는 풍선이 상상의 나래를 펴고 날아가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발목을 잡는 현실의 모든 제약을 상징한다. 어느 정도 논리의 비약이 허용된다면 천장에 매달려 있는 풍선은 마음껏 하늘로 날아가는 창작의 자유를 누리지 못한 채 붙잡혀 있는 영화(인)의 처지이며, 오로지 식당 실내에만 갇혀 지낸 채 디아스포라 시티의 기념일을 맞아야 했던 1000일은 코로나19로 인해 전 세계 영화계가 마비되다시피 한 타격을 입은 지난 3년의 시간에 대응된다고 해석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좁디좁은 실내 공간의 제약된 스케일 안에서도 피사체와 카메라 움직임, 영화적 테크닉의 혼연일체를 통해 시각적 어트랙션의 힘을 빚어내려는, 가히 서커스를 방불케 하는 곡예적 연출은 한국영화의 제작이 멈춰 버리다시피 한 현실에 갇혀 창작의 자유를 잃고 죄수가 되다시피한 영화감독이, 자신을 가두고 제약하는 벽을 부수고자 안간힘을 쓰는 필사적인 몸부림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더 킬러스>는 분명 재능이 있음에도 창작자가 영화를 만들 수 없는 환경에 처한 오늘날 한국영화의 침체기에, 그럼에도 영화를 사랑하고, 그렇기에 영화를 죽이고자 하는 그 모든 것들에 반대하며, 어떤 형태로나 어떤 방식으로든 영화 만들기를 실천해 그 <지독한 사랑>(1996)을 이어 가고자 하는 감독들의 의지와 열정, 그리고 진정성의 산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