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stival
장르영화의 최전선
57회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
- 글
- 이진주(씨네플레이 기자)
- 사진
- SIT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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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회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
기묘하고 아름답다.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매년 눈길을 사로잡는 포스터를 내세웠다. 지난해에는 붉은 피로 물들인 두 손으로 새를 형상화하더니 이번에는 무채색의 옷을 입은 남성의 육체에서 형형색색의 영혼이 빠져나오는 듯한 모습을 담아냈다. 2023년 56회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포스터는 60주년을 맞이한 알프레드 히치콕의 1963년 영화
<새>에서, 2024년 57회의 것은 토드 브라우닝의 1932년 고전영화 <프릭스>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 자체가 하나의 장르인 마냥 메시지와 상징을 더해 내놓은 한 장의 이미지를 보고 있노라면 왜 그들이 세계 최고의 장르영화제로 자리 잡을 수 있었는지 알 것만 같다.
1967년 시작한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스페인 카탈루냐의 작은 도시 시체스에서 매년 10월에 열린다. 그 때문에 ‘카탈루냐판타스틱영화제’라고 불리기도 한다. 스페인 제2의 도시인 바르셀로나에서 남서쪽으로 약 35km 떨어진 곳. 기차에 몸을 싣고 약 30분 정도 달리다 보면 탁 트인 푸른 지중해와 깔끔하게 정돈된 골목이 보이고 여유로운 예술인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시체스다.
포르투갈의 판타스포르토영화제, 벨기에의 브뤼셀국제판타스틱영화제와 함께 세계 3대 판타스틱영화제로 꼽히는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이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축제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영화를 향유하는 ‘인간 장르’에 관심을 가져왔기 때문일 것이다.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공개된 지 약 15년 이상 된 장르영화를 소개하는 ‘세븐 챈스(Seven Chances)’, 극한의 공포를 담아낸 영화를 소개하는 ‘미드나이트 익스트림(Midnight X-treme)’, 광고 및 뮤직비디오를 포함한 애니메이션 장르를 선정하는 ‘애니맷(Anima’t)’ 등 어떤 형식의 작품도 놓치지 않고자 하는 의지를 보인다. 시체스의 이러한 포용력은 영화인과 관객에게도 적용된다. 대표적인 예로 청소년들의 영화 문해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페스티벌 섹션 ‘시체스 패밀리(Sitges Family)’를 들 수 있다. 주로 가족 단위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이 섹션은 12세 이하의 어린아이들을 위한 ‘시체스 키즈(Sitges Kids)’와 10대 혹은 젊은 성인 관객을 위한 ‘판타스틱 틴(Fantastic Teen)’으로 나뉜다. 장르영화의 팬인 부모 세대가 자녀와 함께 시체스의 넉넉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기회가 제공하는 것이다. 57년의 시간 동안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어떻게 모두의 장르영화제로 우뚝 설 수 있었는지를 짐작케 하는 지점이다.
올해로 57회를 맞은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지난 10월 3일에 문을 열어 약 10일간의 항해를 마쳤다. 최고 영광의 작품상은 2014년 <굿나잇 마미>와 2019년 <별장에서 생긴 일> 등의 공동 연출로 존재감을 드러낸 베로니카 프란츠·스베린 피알라 감독의 <데블스 배스>가 수상했다. 이 영화는 지난 7월 열린 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아드레날린 라이드 섹션에 상영되며 한발 앞서 한국 관객과 만난 바 있다.
18세기 오스트리아의 한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데블스 배스>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던 아그네스가 매정한 남편과 시어머니의 집착, 고된 노동 등으로 고통받던 중 그릇된 종교적 신념으로 타락하는 과정을 그린다. 당시 오스트리아 등에서 실제 있었던 ‘대리 자살’(자살이란 종교적인 이유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대신 부러 죄를 저질러 처형을 받는 것)의 사례를 기반으로 해 더욱 섬뜩한 느낌을 준다.
꽤나 호흡이 느린 데다 전형적인 공포영화의 구성을 따르지 않는 <데블스 배스>가 가진 힘은 아그네스 역을 맡은 배우 안야 플라슈그의 장악력에서 기이한다. 미술과 음악, 영화를 모두 섭렵한 그는 <데블스 배스>의 음악 작곡을 의뢰받았다가 대본에 감명받아 배우 오디션에 참여했고 짙은 우울에 빠져 가는 아그네스를 완벽하게 표현했다.
한편, 감독상은 <구룡성채: 무법지대>의 정 바오루이 감독에게 돌아갔다. 그는 대표적인 두기봉 사단으로 2009년 <엑시던트>와 2012년 <모터웨이>, 그리고 신작 <구룡성채: 무법지대>까지 홍콩 누아르 영화의 화려한 복귀를 알리는 데에 앞장서고 있다. 영화 속 배경이 되는 ‘구룡성채’는 홍콩의 전설적인 무법지대였다. 마약과 살인, 가난이 똬리를 틀며 흉물스러운 슬럼가로 자리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홍콩 영화계에 지대한 영감을 준 공간이기도 하다.
<구룡성채: 무법지대>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폐막작)와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모두 사로잡은 것은 화려하고 속도감 넘치는 액션 장면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는 화려한 라인업으로 홍콩영화의 과거와 미래를 한 화면에 담아내는 데에 성공한다. 홍금보, 곽부성 등 원조 스타들과 임봉, 유준겸 등 신예들이 세대 간의 이상적인 화합을 선보인다.
13편의 한국영화 초청57회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는 총 13편의 한국영화가 초청되었다. 김민수 감독의 <더러운 돈에 손대지 마라>, 이종필 감독의 <탈주>, 허명행 감독의 <범죄도시4>,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2> 등이다. 약 16편이 초청된 2018년 이후 가장 많은 한국 작품이 시체스로 향했다. 그중 장재현 감독의 <파묘>가 심사위원 특별상을, 남동협 감독의 <핸섬가이즈>가 관객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영화제 측은 <파묘>에 대해 “최근 몇 년간 나온 초자연적 공포영화에서 가장 좋은 예”라고 평가하며 2004년 37회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초청되어 <올드보이>로 각인된 배우 최민식에 대해 언급했다.
한편, 국내에서 의외의 선전을 한 <핸섬가이즈>는 관객상의 영예를 안았다. <핸섬가이즈>의 원작은 2010년 43회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서 최우수 영화상을 수상한 공포 코미디 <터커 & 데일 vs. 이블>. 영화제 측은 <핸섬가이즈>에 대해 “원작만큼 유쾌하면서도 원작에서 배경으로 밀려난 초자연적 요소를 탐구한다”고 평했다.
사실 영화 <핸섬가이즈>는 흥행을 기대하기 다소 어려운 작품이었다. 같은 시기 극장가는 <인사이드 아웃2>(2779억 원), <하이재킹>(130억 원) 등 대규모의 작품들이 포진했다. 반면 <핸섬가이즈>는 순제작비 49억의 작은 규모로 제작되었을 뿐 아니라 국내 관객에게 낯선 슬래셔 무비(Slasher Movie: 잔인한 방법으로 연쇄 살인을 저지르는 공포영화의 하위 장르)라는 점이 큰 허들이었다. 규모가 크지 않고 장르적 진입장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박스오피스 역주행을 이룬 <핸섬가이즈>는 시체스에서의 관객상 수상으로 기분 좋은 마무리를 하게 된 셈이다.
올해는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먼저 주목한 한국 장르영화도 있다. 김수진 감독의 영화 <노이즈>와 김민하 감독의 <아메바 소녀들과 학교괴담: 개교기념일> 등이다.
경쟁 부문 파노라마 섹션에 초청된 영화 <노이즈>에 대해 영화제 측은 “한국 고전 호러 형식에 충실하면서도 완전히 새롭다”고 전했다. 특히 “올해 최고의 점프 스케어를 볼 수 있다”는 극찬을 남기며 국내 팬들의 기대감을 높였다. <노이즈>는 청각장애를 가진 언니 주영이 갑자기 사라진 동생 주희를 찾아 나서며 밝혀지는 진실에 대한 이야기를 담는다. 영화는 아직 국내 개봉을 하지 않았음에도 프랑스, 태국, 인도네시아 등 해외 74개국에 선판매가 되었다.
한편, 패밀리-틴 섹션에 초청된 영화 <아메바 소녀들과 학교괴담: 개교기념일>은 영화감독이 꿈인 지연과 친구들이 1998년 촬영된 비디오테이프를 보게 되면서 시작한다. 기이한 현상을 겪은 이들은 비디오테이프의 정체를 쫓는다.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왓챠상을 받으며 주목을 받은 <아메바 소녀들과 학교괴담: 개교기념일>은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뿐 아니라 24회 가오슝영화제, 4회 자카르타 필름위크, 30회 룬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선택을 받으며 한국형 호러의 진가를 선보였다.
윤여정, 그리고 박찬욱꾸준히 한국영화계에 주목하며 다수의 한국 작품을 소개해 온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 그 시작에는 배우 윤여정이 있었다. 1971년 4회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김기영 감독의 영화 <화녀>를 눈여겨보았다. <화녀>는 김기영 감독이 자신의 1960년대 작 <하녀>를 리메이크한 작품. 집주인 동식에게 겁탈당한 하녀 명자가 일가족에게 복수를 꾀하는 내용을 담는다. 하녀 명자 역의 배우 윤여정은 이 작품으로 스크린에 데뷔했을 뿐 아니라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한국영화인 최초로 시체스의 문을 활짝 열었다.
한편, 여러 차례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러브콜을 받으며 수상까지 하며 시체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영화인은 누구일까? 또(?) 박찬욱이다. 박찬욱 감독은 앞서 언급한 영화
<올드보이>로 2004년 37회 작품상을 수상하며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와 연을 맺었다. <올드보이>는 현재까지 한국영화 역사상 유일무이한 작품상 수상작으로 기록되고 있다.
뿐만 아니다. 이듬해에는 <친절한 금자씨>의 배우 이영애가 여우주연상(38회)을 수상했고 그로부터 2년 후인 2007년에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로 정서경, 박찬욱이 각본상(40회)을 수상했다. 2009년에는 <박쥐>의 김옥빈이 여우주연상(42회)을, 2011년 <파란만장>이 새로운 시선 부문 영화상(44회)을 수상했으며 2016년에는 <아가씨>가 관객상(49회)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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