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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순간 속 ‘안목’을 키운 시간

2024 아시아콘텐츠&필름마켓의 성과

유승목(한국경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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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

좋은 영화와 극장, 훌륭한 감독과 배우, 그리고 관객으로 함께하는 시네필(Cinephile·영화 애호가)들. 전 세계 이름난 도시에서 열리는 수많은 영화제의 성공 방정식을 요약하면 이렇다. 영화제란 이름을 단 축제가 열릴 때마다 어떤 스타 배우가 레드카펫을 밟고, 얼마나 기대 이상의 ‘웰메이드’ 영화가 개막작으로 걸리는지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유다.

적어도 이런 의미에서 부산국제영화제(B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이하 BIFF)는 대체로 늘 성적표에 성공 도장을 찍어 왔다. “문화 불모지에서 웬 영화제냐”라는 볼멘소리가 무색할 만큼, 1996년 첫걸음을 내디딜 당시부터 18만여 명의 관객을 끌어모으는 ‘대박’을 쳤기 때문이다. 배우부터 감독까지 국내외 유명 영화인들이 남포동 극장 앞 길바닥에서 신문지를 깔고 파티를 벌이고, 해운대 포장마차촌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은 전 세계 어느 영화제에서도 볼 수 없었던 BIFF만의 ‘맛’이었다. 지난 11일 막을 내린 올해 BIFF도 꽤나 ‘성공적’이었다. 63개국에서 224편의 영화가 상영된 올해 행사에서 열흘 동안 14만5238명이 찾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영화는 오롯하게 ‘일상 속에서 이상을 찍는’ 순수예술은 아니다. 고답적이고 예술적 면모(film)를 품으면서도 대중성을 담보한 상업적 선언(movie)이 뒤따라야 하는 게 영화다. 애당초 카메라와 필름이라는 기술적 발명이 없었다면 영화는 태어날 수조차 없었을 테고, 할리우드의 자본과 기획력이 없었다면 캄캄한 극장을 찾아 들어가 두어 시간을 꼼짝없이 앉아야만 즐길 수 있는 영화는 살아남기 어려웠을 거다. 베네치아에서 열리는 미술 비엔날레처럼, 영화제를 단순히 축제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BIFF를 두고 명실상부한 아시아 최고 영화제라 자신 있게 말하려면 동원된 관객이 몇 명이었고, 얼마나 대단한 거장이 발 도장을 찍었는지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얘기다.

참여율 역대 최대의 양적 성장

“사실 국제영화제의 성패는 필름마켓에 달렸죠.” BIFF에서 만난 한 영화제작자는 이런 말을 건넸다. 경쟁력 있는 영화제와 그렇지 않은 영화제를 옥석 가리기 한다면, 그는 고려해야 할 ‘미싱링크’로 초청작품과 관객 수, 인기 영화인의 존재감보다 필름마켓을 꼽겠다고 했다. 이름 그대로 ‘영화를 사고 파는 장터’란 의미를 생각해보면 속뜻이 명징해진다. 삼일장, 오일장, 상설시장 등 이름난 고을마다 내로라하는 장터 하나쯤 있는 것처럼 영화제라면 제대로 된 필름마켓을 갖춰야 한다는 것. 온갖 물자와 사람이 한데 모이고 사고 팔리다 보면 도시가 커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실제로 세계적인 국제영화제는 유명한 필름마켓을 갖추고 있다. 프랑스 칸국제영화제(이하 칸영화제)가 이탈리아 베니스국제영화제, 독일 베를린국제영화제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도 보다 높은 평가를 받는 배경엔 ‘마르셰 뒤 필름(Marché du Film)’이라는 이름의 필름마켓이 있다. 여러 나라의 영화인들이 모처럼 한 곳에 모인 만큼, 이참에 배급권 같은 ‘돈 되는 것’도 서로 사고 팔아 보자는 사소한 아이디어에서 1959년 출발한 이 필름마켓은 이제 제작, 배급, 판매 등에 종사하는 1만 명의 영화인과 4000편의 신작을 만날 수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영화 장터가 됐다. 좋은 영화가 상영되는 건 당연하고, 많은 영화가 사고 팔릴 때 영화제는 힘을 얻는다. 그러니까 적어도 이 필름마켓이 존재하는 한, 전 세계 영화인들의 캘린더에 칸영화제 일정은 최우선순위일 수밖에 없는 셈이다.

국제영화제인 BIFF도 필름마켓이 있다. 1998년 프로젝트마켓으로 시작해 2006년 아시아필름마켓(AFM)으로 확장했다. 매년 몸집을 키우긴 했지만, 흥행을 얘기하기엔 다소 아쉬운 점이 적잖았던 것도 사실이다. BIFF 초청작들이 상영되는 영화의전당만큼 북적이진 않았기 때문이다. 홍콩영화제와 함께 열리는 홍콩필마트(HK Filmart), 도쿄국제영화제와 맞물리는 도쿄필름마켓(TIFFCOM)과 함께 아시아를 대표하는 3대 콘텐츠 마켓으로 자리매김하긴 했지만, 아직 필름마켓만큼은 홍콩과 도쿄가 앞선다는 인상을 지우긴 어려웠다. 영화부터 영상·웹툰·스토리 등 콘텐츠 원천 IP를 대상으로 기획부터 제작·투자·판권 거래까지 한꺼번에 아우르는 BIFF의 주요 비즈니스 행사인 아시아콘텐츠&필름마켓(ACFM)이 꾸준히 성장세를 보여주고 있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영화시장이 ‘셧다운’ 된 여파도 여전한 만큼, 유의미한 실적이 나올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다만 이번 BIFF 기간 부산 우동 벡스코에서 개최된 ACFM은 흥행 측면에서 썩 괜찮은 성과가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넷플릭스 공개작인 <전, 란>을 개막작에 선정하며 생긴 다소간의 잡음이나 내세울 만한 스타가 없었다는 아쉬움을 고려하면 오히려 필름마켓의 성과가 두드러진다는 평가도 나온다. 총 52개국에서 2644명이 참가해 2만6435명의 영화 관계자들이 현장을 방문하며 발 디딜 틈 없이 장터가 북적였다는 점에서다. 지난해보다 37%나 참여율이 늘어난 역대 최대 성과로, 500명이 넘는 바이어가 콘텐츠 거래를 활발히 이어갔고 1676회의 비즈니스미팅이 성사되는 등 양적으로 성장한 모습을 보여줬다. 영화 <기생충>,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 이후 한국이 아시아 콘텐츠 시장의 허브로 발돋움하는 상황에 걸맞은 규모였던 셈이다.

K콘텐츠 수출 창구로의 기능

눈여겨볼 지점은 질적인 성장도 따라왔단 것이다. 올해 직접 둘러본 ACFM에선 ‘극장의 위기’를 넘어 ‘영화의 위기’까지 거론되는 한국 영화시장이 만성적 불황을 탈출할 실마리가 제시됐다. 흥행 양극화로 극장이 활력을 잃고 현시점에서 촬영이 진행되는 작품 수도 고작 20여 편에 불과할 정도로 제작·투자가 얼어붙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 영화·시리즈 IP의 글로벌 진출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한국보다 빠른 회복력을 보이는 해외 영화시장에서 한국 영화 콘텐츠에 높은 관심을 보인다는 점에서 나온 선택인데, 한국이 최근 콘텐츠 저작권 수출국으로 주목받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시의적절한 아이디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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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FM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영화시장이 소개된 게 대표적이다. 영화진흥위원회가 한국영화 IP와 인력의 글로벌 진출을 지원하기 위해 새롭게 추진한 ‘KO-PICK 쇼케이스 ’ 사업의 일환으로 개최한 포럼이다. 무함마드 빈 살만 알 사우드 왕세자 주도로 사우디아라비아 영화산업은 지난해 2억4000만 달러(약 3296억 원)에 달할 만큼 최근 급속도로 성장세를 보인다. 이슬람 국가지만 종교와 관련한 검열도 없고 K콘텐츠에도 높은 관심을 보인다는 점에서 새로운 수출창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한 국내 영화 제작사 관계자는 “한국을 포함한 여러 다른 나라는 통상적으로 현지에서 지출한 제작비용의 20~25% 수준의 인센티브를 주는데, 모든 영상물에 대해 40%라는 파격적인 수준의 로케이션 인센티브를 제공한다는 점에 큰 관심이 갔다”고 밝혔다.

사우디아라비아뿐 아니라 이번 ACFM엔 다양한 국가관 부스가 열렸다. 일본, 대만, 베트남뿐 아니라 이탈리아와 영국이 단독 국가관을 마련하기도 했다. 자국 영화를 한국에 알리려는 목적도 있지만, 국내에서 인기를 얻은 영화뿐 아니라 미공개 작품까지 발 빠르게 선점하기 위한 것이다. 실제로 쇼박스, 콘텐츠판다, 롯데엔터테인먼트 등 국내 영화·콘텐츠사들의 부스엔 해외 바이어들이 눈에 띄었고, 마켓 개막 첫날인데도 미팅 테이블은 빼곡히 들어찼다. 11개 영화사가 마켓에 참여한 이탈리아관 관계자는 “한국 영화시장의 수준이 높다”고 했다.

아시아 ‘퍼스트 무버’로서의 첫 걸음

올해 필름마켓 주요 화두 중 하나를 인공지능(AI)이 차지했단 점도 고무적이다. BIFF를 비롯해 한국 영화계가 글로벌 흐름을 좇는 ‘팔로어’가 아닌 ‘퍼스트 무버’로서의 가능성도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번 ACFM에는 앞선 칸영화제에서 “창작자는 AI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라는 메시지로 주목받았던 미국 IT기업 마이크로소프트(MS)가 아시아 영화제 최초로 AI 체험 라운지를 열었다. 이곳에서 영화인들은 AI 프로그램 코파일럿을 직접 시연해보고 생성형 AI를 영화에 접목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짜깁기 데이터로 창의성을 해친다”며 할리우드 배우와 감독, 작가들이 파업할 정도로 AI는 영화계의 뜨거운 감자다. 최근 실사 촬영에 AI 이미지를 더한 하이브리드 영화가 탄생하며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할 수도 있는 존재로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무성(無聲) 영화에서 유성(有聲) 영화로, 이후에도 흑백에서 컬러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2D에서 3D로 진화를 거듭한 영화가 AI와 함께 새로운 기술적 진보를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칸영화제 현장에서 AI를 주제로 토론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던 박광수 BIFF 이사장은 “AI를 영화 산업과 접목할 수 있는 지점을 짚어보기 위한 취지”라며 필름마켓에 AI 섹션을 들인 이유를 설명했는데, 적어도 트렌드를 주도해야 하는 영화제의 본령을 고려하면 제대로 이슈를 건드린 셈이다. 영화제 외연을 확장하는 동시에 한발 앞서 AI 영화시장 선점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는 분명히 정체하고 있다. 그간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여 왔고 코로나 팬데믹 같은 예기치 못한 악재도 겪었으니 어쩌면 당연할 수 있는 모습이지만, 다시 한 걸음을 내디뎌야 할 때가 왔다. 원활한 자금조달부터 흥행 양극화 해소만 절실한 과제인 줄 알았던 상황에서 올해 ACFM은 해외 IP수출과 AI영화까지 시야를 넓히고 변화의 순간을 이끌고 있었다. 중동 영화판이 새로운 영화의 장(章)을 열고 AI가 영화의 구세주가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아시아 최고 국제영화제의 필름마켓이 영화인의 안목을 키웠다는 점은 반가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