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s or No
세련된 현실 진단, 만족할 수 있나?
<보통의 가족>
나원정 중앙일보 기자·이상용 영화평론가 대담
- 진행
- 김혜선(웹매거진 한국영화 편집장)
- 사진
- 서범세
Yes or No
나원정 중앙일보 기자·이상용 영화평론가 대담
영화 <보통의 가족>이 보여주는 한국 사회의 풍경이 있다. 변호사 형과 의사인 동생, 그들의 아내들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심각한 언쟁을 한다. 우리의 아이들이 범죄를 저질렀다. 어떻게 할까.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과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는 주장이 엇갈리며 두 가족은 파국으로 내몰린다. ‘보통’이라는 단어가 주는 이중성의 딜레마가 결국 ‘보통’의 수준을 넘어서 극단으로 향하는 이야기는 여러 반응을 낳고 있다. 나원정 중앙일보 기자와 이상용 영화평론가가 요즘 한국영화의 어떤 상황까지 엿볼 수 있는 영화 <보통의 가족>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보통의 가족>의 첫인상은 어땠나? 영화를 보고 가장 먼저 떠올랐던 생각은?
요즘 한국영화가 가족의 모습을 다루는 일이 없지는 않지만 가족을 전면적으로 내세운 영화는 드물다. <보통의 가족>의 원작 소설이 <더 디너>인데, 이미 이탈리아에서도 영화로 만들어진 적이 있는 이야기를 한국으로 가져왔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생각했다. 우리가 우리 이야기를 하는 방식을 찾기 어렵다거나 아니면 저런 방식이 더 전달하기 편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한국 사회 혹은 한국 가족이 그만큼 정형화되었고 재미없거나 반대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시대가 오면서 드라마를 통해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뽑아낸 것인가. 그런 고민이 생겼다.
그리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을 때 엔딩을 너무 예상했다. <보통의 가족> 안에는 반복되는 요소들이 있다. 세 번의 식사 장면, 오프닝에서 차 사고로 시작해서 엔딩에도 차 사고로 끝나는 것, 고라니든 노숙자든 거리의 존재들이 반복되는 희생자로서 나타나는 양상들을 꽤 도식적으로 배치했다. 그 과정을 이어나간 결론은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크게 공감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다 있었다. <보통의 가족>이라는 제목과 대략의 로그라인, 이미지들을 봤을 때 통속적인 가족 이야기를 할 거라고 예상했다. 영화를 보니 관객이 원하는 바를 그려 나가면서 세련미를 더하려고 했다는 느낌이었다.
내 아이가 왜 이럴까 하는, ‘괴물화’된 아이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부모의 감정을 그리는 점에 있어서는 최근의 시류를 잇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이상용 평론가의 말처럼 반복되는 요소가 많았다. 관객에게 친절한 방식의 연출이라고 봤다. 전반적으로 약간의 트위스트가 있는, 잘 만들어진 통속극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시류 얘기가 나왔는데, 하고 싶은 말이 많다. 최근 한국영화들을 보면 만만한 게 유튜브요, SNS 소환이다. 오프닝에 등장하는 재벌집 자제와 어느 아버지의 첫 번째 차 사고는 유튜브 상에서 공분을 일으킨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흔한 모습이다. <베테랑2>도 그렇지 않나. 2편에서 유튜브를 더 적극 반영했다. 한국영화 감독들이 유튜브만 보나 싶은 정도다. 물론 유튜브 속 상황은 현실에 존재한다. 유튜브를 보면서 분노가 일어나는 것도. 그런데 드라마라는 건 가족 내부에서 치고받으면서 벌어져야 한다.
<보통의 가족>에는 부모들이 실제로 아이들과 치고받는 과정이 거의 없다. 외부에 대한 리액션을 하는 부모가 있을 뿐. 가족 안에서의 해결 방식은 최소화되어 있다. 이슈가 다 외부화되어서 마치 거울을 보거나 유튜브를 보고 있는 느낌의 영화가 되었다. 한국이 어느 나라보다 유튜브 활용이 강한 사회가 되어 버려서 생긴 문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흑백 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의 12부를 다 본 게 아니라 밈을 보는 경우가 많다. 그 밈에 대한 리액션과 그 리액션에 대한 리액션이 쌓여서 이야기가 구성되는 시대다. 그렇다면 영화는 이 상황을 잘 반영할 것인가 아니면 영화만이 담을 수 있는 고통과 현실의 문제를 다룰 것인가. 지금 가장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시류’라는 말이 이런 점을 건드린다.
그 부분과 연관해 최근 한국영화의 완성도가 하향 평준화되었다는 의견이 많긴 하다.
영화는 우리를 설득시킬 수 있는 매체다. 유튜브는 설득하는 매체가 아니다. 던져주고 자극하고 빠른 피드백과 반응을 일으키는 매체다. 그런데 이제는 유튜브와 영화가 경쟁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유튜브처럼 빠른 자극과 피드백의 세계가 정답이고 관객을 이끌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여긴다면, 영화가 과연 그 방식으로 유튜브를 이길 수 있을까?
한국영화와 유튜브에 대해 얘기하신 지점과 더불어 얘기하고 싶은 게, 요즘 관객들의 공분을 샀던 한국영화의 ‘열린 결말’이다. 아무것도 매듭지어지지 않는. 창작자조차 이야기의 결말을 어떻게 매듭지어야 하는지 잘 모르고 만드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또 하나, 캐릭터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왜 이런 삶을 살아왔는지 이야기하면 관객들이 답답해하고 부연 설명으로 느낀다는 인식이 지금 투자배급사나 상업영화 제작자들에게 입력되어 있는 것 같다. 올여름 영화들도 눈에 보이는 사건 중심의 전개를 가진 영화들이 그나마 잘 되었다. 어려운 시기에 살아남기 위한 전략으로 느껴지지만 아쉽다.
그렇다면 서스펜스 심리극 <보통의 가족>에서 허진호 감독의 연출이 지닌 구체적인 장단점은 무엇일까? 허진호 감독이 더 이상 멜로에 머물지 않으려는 의지는 이미 <덕혜옹주>(2016)<천문: 하늘에 묻는다>(2019, 이하 <천문>)에서도 엿보였다.
원작 소설의 주인공은 동생(영화에서는 장동건이 연기한 재규)이다. 동생의 아이와 사촌인 또 다른 아이, 즉 두 아이로 인해 벌어진 사건을 이야기한다. 이 아이들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를 주인공의 과거 행동들을 통해서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심지어 제2차 세계대전까지 끌어와서 그 원인을 얘기한다. 그런데 <보통의 가족>은 러닝타임 109분 안에 관객들이 흔히 ‘맛있다’고 생각하는 현상적이고 충격적인 부분만 나열한다. 그래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보는 듯한 착시를 갖게 하지만 사실 두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조차도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설명되지 않는다. 치매 노모가 재규를 두고 “얘도 만만치 않은 애다, 화를 잘 내는 아이였다”고 한마디 하는 정도의 단서를 줄 뿐이다.
그건 허진호 영화의 스타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걸작으로 존경해 마지않는 그의 초기작 <8월의 크리스마스>(1998)나 <봄날은 간다>(2001)를 보면 그 영화들의 주인공도 사실 변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냥 풍경과 함께 놓여서 보는 이들에게 스며든다. 그 기저에는 ‘상실’이라는 중요한 정서가 있다. <8월의 크리스마스>의 정원(한석규) 같은 경우에는 죽음을 앞두고 있고, 가족들과의 결별이라는 상실이 있다. 그 안에 다림(심은하)과의 약간의 로맨스가 끼어드는 구조로, 죽어가는 남자의 일상을 응시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카메라워크, 여러 숏, 미장센을 통해서 그 스타일이 구현된다. 이후 <외출>(2005), <행복>(2007)을 지나서 <덕혜옹주>나 <천문> 같은 영화들을 봐도 그렇다. 역사적 기록들을 생각해보면 여러 변화, 갈등, 충돌이 있었을 텐데, 영화 <천문> 속 장영실은 항상 충직하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면서 북극성만 바라보고 있다.(웃음) <덕혜옹주>도 장한(박해일)이 덕혜옹주(손예진)를 끝까지 보필한다. 덕혜옹주는 조선에 대한 배신감도 없이 항상 조선을 생각하는 마음 하나밖에 없다.
이 단선성은 허진호 감독의 초기작들이 지닌 엄청난 에너지이자 매력이었다. <8월의 크리스마스>로 허진호 감독을 만났을 때 이 사람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 너무 좋았다. 하지만 현재의 어떤 굴곡과 충돌, 분노와 갈등의 세계를 묘사하는 데 있어서 그 방식은 효과적이지 않은 것 같다. 여전히 단선적이다. 그래서 후반부에 형 재완(설경구)이 돌변해서 딸을 경찰서에 데려가겠다고 하면 아무리 열심히 받아들이려고 해도 설득이 안 되는 것이다.
원작 소설은 풀코스 디너를 먹는 두 형제 부부의 식사 와중에 과거의 기억과 이 아이들의 현재 사건이 끼어드는 형식이다. 챕터도 전채요리, 메인 식으로 나눈다. 그 와중에 매니저와의 아주 사소한 대화나 일상 대화로 주인공의 캐릭터를 잘 보여준다.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가 캐릭터에 대한 단서를 굉장히 많이 지닌 텍스트였다. <보통의 가족>의 경우는 식사 장면이 분절적으로 등장하고, 두 형제 가족의 이야기가 거의 동시에 흘러가는 구조다. 원작을 압축적으로 바꾸면서, 허진호 감독이 실력 발휘를 할 만한 요소가 각색 과정에서 이미 많이 없어진 상태로 작품과 만났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재미있다고 느꼈던 장면이 있다. 의사인 재규와 오프닝에서 교통사고 당한 아이의 엄마가 함께 있을 때다. 아이 상태가 악화되어 급히 수술을 마친 재규와 수술실 밖에서 기다리던 아이 엄마의 모습을 카메라가 먼 거리에서 로 앵글(Low-angle)로 잡는다. 많은 드라마에서 흔히 보듯 아이 엄마가 무릎을 꿇을 거고 아이가 죽었나 보다 생각하게끔 만드는 비관적인 느낌의 앵글을 깔더니, 이어서 아이가 살았다는 재규의 말을 들려주며 긴장감을 해소한다.
또 하나, 조용히 기도실에서 울던 재규가 기도실로 들어오는 아이 엄마를 보고 당황해서 의자 밑으로 기어 나올 때 그를 지나치는 아이 엄마의 모습을 보여줄 때도 그렇다. 인물이 두 명만 나온 장면에서는 샷과 카메라 앵글이라는 지극히 영화적인 화법으로 그 장면이 전달해야 하는 감정을 잘 전달한다. <보통의 가족>이 매우 통속적이지만 웰메이드라고 생각했던 이유가 이거다. 어쨌든 이미지로 말할 줄 아는 감독이 만든, 이미지로 말하는 영화를 보고 있어서였다. 최근 한국영화들에 비해서 비교적 세련된 영화라고 느끼게 만드는 지점이었다.
확실히 세련된 컷 연결이 있다. 연경이 아들에게 범행을 따져 물었을 때, 그다음 컷으로 넘어가면 재완의 회사로 딸이 찾아오는 식이다. 교차편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연결 고리들을 군데군데 잘 배치했다. 요즘 한국영화에서 이조차 못해내는 영화도 많다. 여러 다른 컷들을 자연스럽게 연결해 그 시퀀스가 하나의 어떤 덩어리처럼 느껴지게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은 허진호 감독이 이전에도 잘했던 것이고 그 매력들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렇다면 극 중에서 중요한 세 번의 식사 장면 연출은 어떻게 생각하나?
식사 장면은 일종의 미장센이다. 중산층 이상의 계급인 형제 부부 네 사람이 고급 코스 요리가 나오는 식당에서 만난다. 이것도 요즘 한국 사회의 풍경 중 하나잖나. 소위 ‘오마카세’로 대변되는. 이게 트렌드라는 걸 알겠고 이 영화가 그걸 끌어왔다는 것도 알겠다. 사실 좋은 가족 드라마는 식사 장면 하나만으로도 이야기를 끌고 갈 수 있다. 그런데 세 번의 식사 장면, 특히 전반부와 후반부의 두 식사 장면은 별반 차이가 없다.
심지어 메뉴가 바뀐 것도 잘 모르겠다.(웃음)
앞의 식사 장면에서는 먹고 체할 것처럼 기분 나빠진 상태로 화장실에 간 여자들의 대화가 붙어 있고, 뒷부분의 식사 장면에서는 흥분한 재규가 테이블을 다 쓸어버리는 장면이 있는 것 정도다. 그렇다면 굳이 식사 장소가 그곳이어야 할까? “짜장면집이어도 되고 만두집이어도 되는 것 아닌가.” 두 번의 식사 장소가 인물들의 ‘계급적 정체성 플러스알파’로 뿜어낼 수 있는 어떤 영화적, 장면적 효과를 지녔나 생각해보면 의문이다.
형과 동생이 사고방식뿐만 아니라 실제 가정형편 자체도 차이가 난다는 설정이 머리로는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들의 식사 장면이나 평소 하는 행동에서는 여실히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변호사인 형 재완이 변호하는 사건의 피고인과 자기 자식에 대한 대응이 다르다는 것, 동생 재규와 연경(김희애) 부부가 사회적으로 덕망 있고 봉사 활동도 해 왔지만 자식 때문에 돌변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 결국은 자식 문제 앞에서 장사가 없다는, 그 한마디로 요약되는 것 외에는 캐릭터의 결이 다소 무디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설경구 배우는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에서도 비슷하게 아이를 둔 변호사 아버지 역할을 맡았었다. 김희애·장동건 배우는 여러 드라마에서 옷을 잘 입고 나오는, 혹은 젊은 여자와 각을 세우는 역할로 나와서 그게 오버랩 되었다. 배우의 기존 이미지와 연출 사이에서 길을 잃고 명확한 캐릭터를 보여주지 못함으로써 식사 장면 등의 상황이 재밌게 전달되지 못했다.
수현 배우의 경우 할리우드 영화에서 주로 보였던, 젊고 자신만의 유능한 능력을 갖고 있는 여성으로서의 이미지를 가져왔다. 그런데 재완의 아내 연경이 나이가 어리고 예쁜 ‘형님’ 지수에 대해 가지는 감정이 질투심 이상의 어떤 감정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애초에 의도했던 캐릭터 설정이 럭셔리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장면을 위해서 많이 희생된 것 같다.
변화를 줄 수 있는 여지는 꽤 많이 있었다. 두 번째 식사 장면에서 베란다에 나온 연경에게 지수가 담뱃불을 붙여주는, 같은 엄마의 위치에서 어쩔 수 없이 느끼는 공감이나 연대감을 줄 수 있는 장면들. 그런데 그런 장면을 툭 던져놓고 지나간다. 부모가 아이들의 사건, 즉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 던져졌을 때 받는 실제적 충격에 대한 리액션이 이 영화에 있나? 재규가 아들을 차에 태우고 경찰서 앞까지 갔다가 돌아온 이후부터는 더 이상 없다. 형제들끼리 더 내밀한 대화가 필요했다. 그런 대화가 거의 안 일어난 채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형, 왜 이래 갑자기!”라고 부정적인 반응만 드러내다가 영화가 끝나 버리니 이 애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안 보인다. 이건 ‘열린 결말’도 아니고 허망할 뿐이다. 그 지점을 제대로 매듭짓지 못한 게 이 영화의 최대 약점이다.
지금 10대, 20대들이 극장 흥행의 절대 주축은 아니지만 그들의 입소문이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게 다시 20대, 30대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다. 감독들이 그런 젊은 세대를 어떻게 그릴 것인가를 두고 ‘내가 잘 모르겠으니 뉴스에 나오는 딱 그 부분만 표현하겠다’라는 식으로 안전한 선 안에서만 움직이려고 한다. 그게 조금 안타깝다.
연령대가 엇갈리는 형제 부부의 매칭(설경구-수현의 중년 남자와 젊은 아내 부부, 장동건-김희애의 연하연상 부부)은 어떤가? 영화의 흥미로운 결을 만드는 데 효과적이었을까?
원작에서 주인공은 역사 교사였고 온건한 시민처럼 그려지지만 알고 보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람이 죽지 않았으면 지금 인구수가 얼마나 늘었겠냐” 같은 극단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심지어 아들의 학교 숙제였던 사형제도 관련 글쓰기에서 사적 복수에 찬성하는 문장을 칭찬하는 등 망가진 부분이 나중에 드러난다. 믿지 못할 화자로 교묘하게 활용되고 있다.
영화 <보통의 가족>에서는 그런 부분이 전혀 없다. 재규에 대해서 다소 돌발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 이상의 인상을 받지 못했다. 다만 재규의 아내 연경이 남편보다는 더 침착하고 더 많이 생각한다는 캐릭터 설정을 연상의 부인으로 표현한 것 같다. 원작에서는 한쪽 부부에게 입양한 아들이 있고 이야기를 그 아들과 관련한 흉악한 상황까지 밀어붙인다. <보통의 가족>에서는 그런 파격 요소를 넣는 대신 ‘중년 변호사가 재혼한 젊은 여성’이라는 지수 캐릭터의 설정을 넣어 이해하기 쉽게 만든 것 같다.
네 인물들 중에서 가장 매력적이었던 게 지수다. 지수는 첫 등장에서 집에서 필라테스를 하며 몸 관리 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정형화된 캐릭터인가 싶었는데, 이야기가 흘러갈수록 지혜로운 부분들이 있고, 균형추를 잡아주는 역할이었다. ‘보통의 가족’이 사실 다르게 표현하면 ‘요즘의 가족’이지 않나. 요즘의 가족은 이혼, 재혼이 일상화된 시대를 산다. 영화 <보통의 가족>이 ‘보통의 가족’의 평균치나, 혹은 평균치보다 더 앞선 모습을 보여줬느냐 했을 때 지수 캐릭터가 그나마 후반부에서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보통의 가족>은 요즘 사람들이 흔히 자조적으로 떠올리는 ‘보통’이란 의미가 이런 이기심과 이중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어떤 허용치 안에서 만들었다고 본다. ‘보통’의 초상화를 만들려고 한 노력이 어떤 것도 고집하지 못하게 만든 건 아닐까. 처음엔 재규-연경 부부가 더 중심인 것 같지만 결국 등장인물들에게 똑같이 비중을 둠으로써 오히려 누구의 내면도 제대로 얘기하지 못했다. 물론 이건 <보통의 가족>이 취한 전략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허진호 감독은 한두 명 정도에 초점이 맞춰진 이야기에서 훨씬 장기가 잘 드러나는 감독이다.
한국 사회에서 중산층 이상의 계층이라 할 수 있는 두 형제 부부가 자녀들의 문제로 인해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보며 우리가 얻는 것은 결국 무엇일까?
전반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에서 노숙자 폭행 동영상이 떠돌 때만 해도 두 형제는 큰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가 오프닝에서 차 사고로 살인을 저지른 가해자를 변호하던 재완이 사무실에서 가해자가 보여준 반응에 분노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폭행한 노숙자가 죽었다는 얘기를 동생 재규로부터 들었을 때 한 번 더 충격을 받는다. 다 외부적인 것에 대한 반응들이다. 재완은 하필 아기 방에서 설치된 CCTV로 아이들의 실체를 보게 되면서 갑자기 분노를 한다. 아이들과 직접 대화한 게 아니라 그냥 외부의 이미지만 보고서 마음이 또 변한 거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게 다 그렇다. 정치든 경제든 사회문제가 되었든 직접 접한 게 아니라 미디어에 의해서 전달된 것들에 의한 피드백밖에 없다. 그런 사회로 가고 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판단해야 될까.
재완은 딸과 제대로 얘기를 해봐야 한다. 그런 장면이 하나도 없이 딸을 데리고 경찰서에 갈 거라는 재완의 모습은 설득이 안 된다. 재완이 갑자기 확 돌변하는 모습은 SNS나 유튜브에 누가 게시물을 올리면 “이거 나쁜 애들이야”라고 금세 낙인찍는 것과 뭐가 다를까. 문제에 대한 판단 수준이 너무 요즘 사회에 맞춰져 있다. 한국영화는 여기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앞으로 다른 방향과 각도를 찾아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
우리가 계속 얘기하는 맥락이 결국 영화가 현상적인 것만 보여준다는 것이다. 오프닝의 자동차 사고 장면을 보면 딸을 태우고 가던 아빠가 분노 조절이 안 된 채, 분노 조절이 역시 안 되는 또 다른 사람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사고가 벌어진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결국 자식 문제, 그리고 모두가 분노 조절이 안 되는 사회라는 두 가지만은 확실히 보여준다. 그게 허진호 감독 혹은 각본가, 제작자가 보는 지금의 한국 사회일 수는 있겠다. 그게 또 관객에게 받아들여질 거라고 생각했다면 이 영화의 엔딩은 그 목적에 부합한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는 한국영화가 너무 많다. 창작자라면 진단만 하는 게 아니라 위험 부담이 크겠지만 어떤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어야 한다. 최근에 이런 갈증을 해소해준 감독이 없었다.
위험을 무릅쓰지 않아서 흥행이 보장된다면 좋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다. 소위 투자사들에서 정하는 제한적 사항들, 규칙들 같은 것을 지켜서 한국영화가 새롭게 보이고 엄청난 흥행 성적을 올린다면 비평가로서 오히려 입을 닫아 버릴 텐데, 그것도 아니지 않나. 어떤 영화를 보고 극장에서 나올 때 더 하고 싶은 얘기들이 있어야 한다. 보고 나서 “그래, 이게 한국 사회지. 끝” 하게 되는 정도로는 유튜브를 이길 수 없다. 우리가 영화를 2시간 동안 돈을 내고 보는 데에는 분명 오락적인 요소가 있지만 한국영화가 2000년대 이후 지금까지 성장해 왔던 건 분명 어떤 성찰을 던져줬던 지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의 결정을 좌우하는 아이들의 행동은 아이방 CCTV 몰카 영상과 노숙자를 폭행하는 사건 현장 CCTV 영상 외에는 없다. <보통의 가족>이 우리 사회의 초상을 그리고 있지만 이 영화가 또다시 이 사회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면 조금 위험하다고 느껴진다. 이 캐릭터들의 모습이 정상 가족 혹은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사고방식이라고 받아들여질 수 있으니까. 청소년 캐릭터를 그리는 데 있어서도 무책임한 면이 있다. 서사적인 장치로서 쓰고 아무 매듭을 짓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렸다.
아이들이 괴물 같다는 이야기는 많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괴물>도 그렇고. 내 아이가 내가 케어하는 범위 내에서 잘 자라고 있다고 생각했다가 괴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에 오는, ‘나는 뭐지? 내가 괴물이기 때문에 괴물을 낳은 것인가’라는 자기성찰, 혹은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이 사회는 도대체 뭐지?’라는 사회적 성찰, 혹은 같이 아이를 키우는 부모 입장이며 치매인 어머니의 문제를 해결해 온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합의되지 않는 이 사회의 현실 같은 것들을 이야기하려면 아이들이 저지른 사건이 지금보다 훨씬 먼저 나와야 한다. 시나리오의 구조에서 그 점이 가장 아쉽다.
최근 한국영화에서 자신의 연출권을 관철할 수 있는 감독들은 대부분 다 장르영화를 찍는 사람들이다. 사람이 죽거나 액션이 나오거나. 그게 지금 K-무비에서 가장 잘 팔리는 요소라고 얘기되고 있고. 허진호 감독은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보여주는 작품을 잘 찍는 감독인데, 그 역시 장르화하지 않으면 중견 감독으로서 존재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 것 같다.
극 중 연경이 재완의 딸을 위해서 가짜 자원봉사증을 써준다. 한국에서 계속 문제가 되고 있는 이슈 중 하나다. 돌출시킬 수 있는 뾰족한 부분들이 분명 있다. 그런데 <보통의 가족>은 그 뾰족한 것들을 그냥 훅 넘어간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한국 사회가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졌구나’라는 것이 확연히 드러났을 텐데. 지금은 ‘합의된 가족’ 정도에 머물러 버린다.
<보통의 가족>은 결국 Yes인가, No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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