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다시 출발선에 섰다”
<더 킬러스> 심은경
- 글
- 김혜선(웹매거진 한국영화 편집장)
- 사진
- ㈜스튜디오빌
Interview
<더 킬러스> 심은경
배우 심은경이 옴니버스 영화 <더 킬러스>로 돌아왔다. 2018년 <궁합> 이후 한국영화로는 6년 만의 복귀작이다. 이명세 감독이 총괄하고, 김종관•노덕•장항준 감독 등이 합세한 <더 킬러스>는 개봉관에서는 <변신> <업자들> <모두가 그를 기다린다> <무성영화>까지 총 네 편을 공개했고, 이후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플랫폼에서는 총 6편으로 공개될 예정이다. <변신>은 킬러들에게 쫓긴 남자가 뱀파이어가 바텐더로 있는 바에 들어가는 이야기, <업자들>은 하청에 하청을 거쳐 살인 청탁을 받은 킬러 3인방이 잘못된 인질을 잡는 이야기, <모두가 그를 기다린다>는 군산의 한 술집에 전설적인 킬러를 잡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의 혈투, <무성영화>는 디아스포라 시티의 한 바에 들어온 두 킬러들과 세 사람의 기묘한 액션을 다룬다. 심은경은 모든 단편에 얼굴을 보이며, <더 킬러스>의 세계관을 만들어 가는 구심점이 된다. 그간 <신문기자> <블루 아워> 등으로 일본영화계에서 활약해 왔지만 그는 <더 킬러스>를 통해 배운 것이 많다고 전한다. 배우로서 혼란스러운 시기를 거쳐 영화에 대한 사랑과 호기심을 반짝이며, 관객을 낯설게 하는 새로운 연기를 꿈꾼다. 여전히 어떤 모습으로 변화할지 모르는 ‘수상한 그녀’다.
<더 킬러스>의 모든 단편에 출연했다. 단순한 출연이 아니라 심은경 배우의 목소리와 얼굴, 몸짓이 서로 다른 네 편의 이야기들을 관통해 연결성을 부여한다. 그 사실이 배우로서 어떤 감정과 태도, 시선을 갖게 했나?
일단 배우로서 이런 프로젝트가 너무 귀하다. 한국영화가 침체기를 맞고 있는 힘든 상황임에도 이명세 감독님을 필두로 충무로에서 내로라하는 감독님들이 다 모이셔서 각양각색 장르의 작품들을 준비하셨다. 안 할 이유가 없었다. 처음엔 이명세 감독님이 직접 연출하시는 <무성영화>만 출연 제의를 해주셨는데, 어쩌다 보니 전체 작품을 다 관통해 중심을 잡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더 킬러스>는 기존에 내가 연기해 오던 방식과 확실히 다르게 접근했다. 이명세 감독님께서 전체적으로 많이 잡아주셨고 각 단편들마다 그 안에서 어떻게 각 캐릭터를 확연하게 드러낼 수 있을지 감독님들과 논의했다. <무성영화>의 경우, 이명세 감독님이 반드시 리허설을 해야 하고 100% 후시녹음을 할 거니까 현장에서 대사가 엉켜도 액션에 집중해 달라고 하셨다. 그래서 거의 일주일간 연극 연습을 하듯이 리허설을 했다. 그러면서 내가 연기를 준비하는 자세에 대해서 고찰하게 되었다. 그동안 연기를 준비하는 방식에 있어서 나태하고 놓친 부분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킬러스>는 내게 다시금 출발선에 서게 해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단편 <변신> <업자들> <모두가 그를 기다린다> <무성영화>에서 맡은 캐릭터들이 바텐더, 인질, 잡지 표지모델, 그리고 웨이트리스다. 장르부터 성격까지 전혀 다른 캐릭터들을 연기하면서 그 의미를 어떻게 찾아갔나?
<변신>은 김종관 감독님 식의 컬트 무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연우진 배우가 맡았던 캐릭터나 내 캐릭터의 전사가 그려지지 않는다. 그저 상황이 일어난 채로 일단 진행된다. <록키 호러 픽쳐쇼> 같은 영화를 보면 인물들이 결혼식을 가다가 길을 잘못 들었네 하더니 어떤 성에 들어가고 일이 벌어지지 않나. <변신>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그런 느낌이어서 흥미로웠다. 내가 연기한 바텐더는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샤이닝>에서 잭 니콜슨이 호텔에서 만나는 바텐더를 오마주하고 싶었다. 진짜로 마주 보고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환상인지 모르겠는, 그 불분명한 경계의 느낌을 가져오고 싶었다.
알프레드 코르토라는 피아니스트를 좋아한다. 이분이 동료들과 함께 챔버 연주를 한 앨범에 세자르 프랑크라는 프랑스 작곡가의 바이올린 소나타 곡이 있었다. 뱀파이어가 바에서 이런 음악을 들으면서 혼자 피를 마시고 음미하는 모습이 그려지더라. 김종관 감독님께 그 음악을 링크로 보내드렸더니 가편집 때 쓰셨고 결국 완성된 영화 안에도 넣으셨다. 개인적으로는 ‘뱀파이어 영화’에 대한 열망이 많다. 그래서 가장 즐겁게 촬영한 작품이고 관객들 눈에도 내가 신나 하는 게 다 보일 것 같다. 일주일만 더 촬영하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아쉬웠다.
<업자들>은 처음 노덕 감독님의 대본을 읽고 킬러들의 인질이 된 소민이 배우로서의 역량을 보여줄 수 있는 역할이라고 느껴서,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사실 노덕 감독님이 소민 역으로 중년 여성 배우를 고려하셨는데 내가 하고 싶다니까 “그래?” 하면서 얼른 바꾸셨다는 비하인드도 있더라. (웃음) 그 역할은 블랙 코미디 연기가 필요하다. 관객들에게 ‘저게 무슨 상황이야? 거참, 웃을 수도 없고 이게 뭐야’ 하는 감각을 부여해야 되니까. 이전과는 다른 관점에서 코미디 연기를 할 수 있었다.
장항준 감독님의 <모두가 그를 기다린다>에서는 잡지 표지모델로만 나온다. <수상한 그녀> 때의 느낌과 비슷한 메이크업을 준비해서 <무성영화> 촬영 전에 얼른 찍었다.
마지막으로, 이명세 감독님의 <무성영화>는 정말 스펙터클했다. 촬영 전까지도 감독님께서 계속 뭘 바꾸시고 콘티도 갑자기 보내오시는데, 콘티를 봐도 어떻게 진행이 될지 전혀 모르겠는 거다. 내가 그동안 했던 방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롯이 이명세 감독님을 믿고 머릿속을 다 비웠다. 감독님께서도 “그냥 느껴. 영화는 느끼는 거고 네가 지금 몰라도 나중에 다가오는 게 있다”고 하셨다. 어느 순간 촬영장에 들어가니까 감독님이 원하시는 액션 연기들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리허설 덕분이었다. 연기도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던 현장이었다.
<무성영화>에서는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극장으로 돌아갈 수 없던 상황이 ‘디아스포라 시티’로 은유가 되고, 그 안에서 선샤인, 스마일, 보이스가 킬러들과 부딪치고 허우적대는 모습은 그 시절 영화인들의 절박한 마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무성영화>는 중의적인 의미들이 특히 많이 담긴 영화다. 감독님도 각자의 해석으로 바라보길 원하실 거다. 이명세 감독님의 생각을 빌리자면 <살인자들 The Killers>이라는 단편을 썼던 헤밍웨이 자신이 1920년대 대공황을 대표하고 허무주의를 대표했던 작가인데, 그의 시절과 지금은 무엇이 다를까.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영화로 표현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리고 영화가 어느 순간부터 내러티브를 너무 중시하는 쪽으로 쏠려 있다. 이명세 감독님은 “영화는 이미지의 연속”이라고 표현하신다. 그 이미지들을 어떤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가 아니라, 이미지 자체로 다시 구현해보고 싶어 하셨다. 고전영화들이 그렇지 않나. 무성영화 <노스페라투>는 스토리가 명확하다기보다는 드라큘라 그림자나 이빨 같은 무서운 형상을 어떻게든 기괴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이미지를 연출한 게 보인다. 그러니, <무성영화>는 지금 이 시대에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동시에 감독님이 구현해보고 싶었던 메시지와 꿈이 담겨 있다.
이 영화의 모티브인 헤밍웨이의 단편 <살인자들 The Killers>과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Nighthawks>을 읽고 느껴보는 시간도 당연히 가졌겠다. 두 작품에서 받은 인상은?
나도 막 알아가는 단계라서…. (웃음) 집에 에드워드 호퍼의 화집이 있다. 어릴 적부터 그 화집을 봐 와서 친숙한 작가다. 헤밍웨이도 마찬가지다. 그의 작품 중에서 단편 <살인자들>은 <더 킬러스>를 준비하면서 읽게 되었다. ‘카프카의 <변신> 길이는 되겠지. 이 안에서 어떤 거를 가져오셨나’ 해서 읽어봤더니 정말 짧았다. 10페이지도 안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갑자기 끝난다. 킬러들이 들어와서 다짜고짜 “그 사람 어디 있냐”고 묻고, “저희는 6시 정각에 시작하고 저 시계는 10분 느립니다” 같은 얘기들을 한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가 지금의 우리에게, 그리고 내게 주는 울림이 확실히 있었다. 가장 크게 느낀 건 어떤 여백이다. 촘촘히 짜여져 있고 꽉 채워진 작품들도 물론 좋지만, 여백이 있어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이우환 화백의 작품도 그런 여백을 중요시한다. 바쁘게 돌아가는 이 시대에 그 여백의 중요성을 보여주고자 하는 작품을 만들고 내가 참여할 수 있어서 큰 의의가 있다.
<변신>의 바텐더로 등장할 때부터 발성이 달라졌다고 느꼈다. <궁합>(2018) 때만 해도 소리를 안으로 삼키는 발성이었다면, 지금은 더 자연스럽게 대사를 다루고 낮게 호흡을 뱉는다. 보이지 않는 노력의 시간이 있었나?
진짜 노력을 많이 했다. 사실 내 목소리와 발성이 굉장한 핸디캡이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여러 사람들이 내 연기의 부족함에 대해 얘기할 때 항상 발음, 발성에 대해 지적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최근에 MBC 라디오의 ‘잠깐만’ 캠페인을 녹음했는데, MBC 라디오 미니에 들어가서 들어보려고 검색을 했더니, 내가 2015년에도 한 게 있는 거다. 내 목소리지만 그때는 지금과 정말 달랐다. 내 목소리는 늘 조금 들떠 있는데, 그건 내가 타고난 톤이다. 그 목소리가 연기에 안정감을 주지 못하는 거라면 의식적으로라도 바꿔야 되겠다 싶어서 보이스 트레이닝을 받았다. 일본에서 연극을 준비했을 때 내가 연극 경험이 없으니 보이스 트레이닝을 받아보라고 일본 소속사 쪽에서 권유해주셨다. 그때 트레이너 선생님과 낮은 음을 내는 연습을 많이 했다. 처음에는 의식적으로 톤을 낮춰서 말했는데 지금은 습관이 되어서 평상시 말을 할 때도 그 톤이 비슷하게 유지된다.
첫 일본영화 출연작인 <신문기자>(2019)를 다시 봤더니, 일본어로 말할 때의 발성이 달랐다. 즉,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한국어와 일본어의 톤 앤 매너가 다르다. 일본어 자체는 굉장히 무채색이다. 일본어의 높낮이가 들쭉날쭉하지 않고 평이하기 때문이다. 일본어를 배울 때 “오하이오 고자이마스~”가 내 귀에는 높낮이가 있게 들리는데 실제로 일본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굉장히 평이한 톤으로 말한다는 거다. 그래서 일본어 연습을 하면서 받은 영향도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깨야 할 퀘스트를 하나 깼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다 고칠 수는 없을 거다. 아직까지도 시옷 발음이 많이 세는 편이다. 예전에는 “이렇게 타고난 걸 어떡하란 말이야?”라면서 속상해했는데, 지금은 최대한 여러 방법을 강구하려고 한다. 나는 정체되어 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고 심지어 두려워한다. 계속 나 자신을 돌아보고 뭘 더 채워 넣으면 좋을까 생각한다. 물론 힘겹지만 그게 내 일이다.
<변신>의 뱀파이어 바텐더, <업자들>의 인질, <무성영화>의 웨이트리스를 통해 각기 다른 표정을 보여주고 있다. 내게서 나올 수 있는 표정 중 가장 낯선 표정을 찾았다고 느꼈던 캐릭터가 있나?
그런 부분은 잘 못 느꼈다. 왜냐하면 내 스스로는 그런 뱀파이어 역할에 갈망이 있고, 내가 어린 시절 <불신지옥>(2009)이라는 어마어마한 한국 오컬트 영화를 찍지 않았나. (웃음) 외려 나는 그런 쪽으로 특화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많이 봐주시고 알려진 작품들이 <써니>(2011)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수상한 그녀>(2014)로 이어지다 보니, 코미디를 잘하는 배우라고들 생각하신다. 사실 코미디는 너무 힘들고 잘 못한다. 코미디 연기를 할 때는 머리가 너무 아프다. 그래서 <업자들>이 특히 어려웠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캐릭터의 희로애락을 잘 표현해야 해서.
<무성영화>는 내레이션과 신체 연기, 배우들의 앙상블이 설계된 빛과 그림자 안에서 특유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이 과정에서 이명세 감독이 배우들의 표현력을 어떤 방식으로 끌어냈는지도 궁금하다.
움직임의 레퍼런스가 다 있었다. 웨이트리스 선샤인이 처음 내레이션을 할 때는 빌리 와일더의 <이중배상>(1944)에서 주인공이 자기 고백을 하는 말투처럼 시작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선샤인이 웃는 모습들은 페데리코 펠리니의 <카비리아의 밤>(1957)에서 여주인공이 마지막에 웃는 모습을 참고했다. 자크 따띠의 세련된 슬랩스틱도 레퍼런스가 되었다. 웨이트리스 선샤인이 손을 슬그머니 내밀어 망치를 쥐려고 하는 액션들은 로베르 브레송의 <소매치기>(1960)를 참고했다. 손을 그렇게 유연하게 사용하는 연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하면서 정말 신이 났다. 스마일 역의 고창석 선배님이 많이 도와 주셨다. 고창석 선배님은 ‘움직임 연구소’ 출신이시기도 하다.
<무성영화>의 선샤인을 잘 연기하려면 몸의 중심이 잘 잡혀 있어야 했다. 이전까지는 연기할 때 항상 목 위로만 움직였던 것 같다. 그런데 움직임이 자유로워지니까 연기가 더 풍부해지는 거다. <더 킬러스> 촬영을 마치고 나서 어떤 연기 책을 읽다가 발레와 펜싱이 움직임과 유연성 향상에 매우 좋다는 걸 봤다. 발레는 예전에 했는데 잘 맞지 않았다. 집 근처에 펜싱장이 있어서 펜싱을 배우기 시작했다. 꾸준히 해서 몸의 중심을 잡아 가려고 한다. 초등학생들과 같이 수업을 듣고 시합을 하는데 맨날 진다. 한번은 운 좋게 이겨서 “야, 봐봐 내가 이겼잖아!” 이랬더니 애들이 “아이고, 막 그렇게 좋아요? 이겨서?” 한다. (웃음) 요새 못 가고 있는데, <더 킬러스> 개봉이 잘 마무리되면 다시 시작할 거다.
<더 킬러스>를 위해서 고전영화들을 많이 본 것 같다. 평소에도 고전영화들을 즐겨 찾아보나?
박찬욱 감독님이 어느 GV에서 고전영화 많이들 보라고, 그걸 레퍼런스로 따오면 뭔가 있어 보인다는 말씀을 농담처럼 하셨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안에 모든 기본이 다 있으니까. 언젠가 진 캘리의 <사랑은 비를 타고>(1952)를 보면서 너무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그 배우들이 직접 춤을 추고 움직인다. 옛날에는 그게 기본이었다는 거잖나. 저 시대 때 어떻게 저런 비주얼과 저런 앵글, 저런 세트 구성을 생각했을까. 2024년에 만든 영화라고 해도 무방한 세련됨이 그 안에 다 있었다. 그것들을 본받고 싶어서 고전영화를 계속 공부하려고 찾아보게 된다. 실은 이명세 감독님 덕분에 더 빠지게 되었다. <무성영화>를 준비하면서 감독님의 세계관을 이해하려다 보니 더 고전영화에 심취하게 된 것 같다.
<더 킬러스>는 2018년 <궁합> 이후 6년 만의 한국영화 복귀다. 그 사이 일본 활동이 활발했고, 한국영화 신작도 촬영했지만 한국 관객에게 보이지 않았던 시간 동안 잊혀진다는 불안함은 없었나?
코로나19 시기를 지나면서 업계의 흐름이라든가 판도가 조금 달라지지 않았나. 이제까지의 방식들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것 같았다. 영화계가 힘들어지는데 내가 설 자리가 있을까? 스물여덟, 스물아홉에 그런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헤밍웨이가 노벨 문학상을 탔을 때 이런 말을 했다. “작가에게 작품 한 편 한 편은 성취감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을 이루기 위해 다시 시도하는 새로운 시작이어야 한다.” 예술은 이런 거라고 생각한다. 이명세 감독님도 “영화는 ‘비욘드 이미지’, 그 너머의 무언가”라고 하셨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나도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고 어떤 형태가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래도 그것을 향해서 가고 있고, 이미 만들어진 훌륭한 영화들과 예술 작품들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싶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점점 무의미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배우로서 계속 해 나가도 되는 건가, 시대에 뒤처져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오는 불안감은 있었던 것 같다. <신문기자>로 큰 상을 받고 일본에서 작품들을 계속 찍었으니까 “나는 괜찮아, 문제없어” 이러면 그게 결국 도태되는 길이라는 걸 잘 안다. 그것들이 영원하지는 않으니까.
지금 한국영화계는 침체기에 접어들었다는 의견이 많은 반면, 일본영화계에는 세계에서 주목하는 젊은 거장들이 생겨나고 있다. 일본은 박스오피스가 회복된 반면, 한국의 극장 상황은 여전히 어렵다. 이제는 한일 양국 영화계에 동료들이 많을 텐데, 이런 상황에 대한 대화도 나누는지 궁금하다.
한국이나 일본에 친구가 많은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양국을 오가면서 활동을 하니까 알게 되는 것은 있다. 일본영화계는 한국보다 인디영화들의 뿌리가 잘 내려져 있는 생태계 같다. 2023년에 만들어진 일본영화 편수가 600편이 넘는다고 들었다. 대부분 인디영화들이지만 크건 작건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는 거다. 일본은 오히려 코로나19 시기를 지나고 영화관 관객 유입이 늘었다고 하더라. 너무 부럽다. 신인 감독에게 기회도 더 많이 열려 있는 것 같다. 아직 못 봤지만 야마나카 요코 감독의 <나미비아의 사막>이 지금 일본영화계의 화제작이다. 1997년생 감독인데, 그런 감독의 영화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걸 보면 다시금 일본영화가 예전의 전성기를 찾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일본 고전영화들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1960년대부터 1980년대가 일본영화의 전성기였지 않나. 르네상스가 다시 도래하도록 젊은 감독들이 많이 으쌰으쌰 하는 기운이 있다. 대표적인 분들이 하마구치 류스케, 미야케 쇼 같은 감독이고. 한국에도 좋은 자극을 주는 것 같다. 그 사이에서 양국을 오가며 활동할 수 있다는 건 큰 행운이다.
그런 면에서 또래 배우들 가운데 한일 양국의 영화 시스템에 대해 가장 잘 아는 배우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 장점을 살려서 앞으로 해외 공동 제작이나 프로듀서로서 역할도 해볼 생각이 있나?
할리우드 배우 젠데이야가 <챌린저스>의 프로듀서다. 너무 멋있더라. 젠데이야가 나보다 두 살인가 어리다. (웃음) 그런데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젠데이야는 나의 소중한 파트너”라고 이야기한다. 진짜 할리우드란 대체 어떤 곳인지. (웃음) 젊은 배우들이 벌써부터 어떤 구상을 하고 그것을 밀고 나가는 걸 보면 자극을 많이 받는다. 하지만 내가 무언가를 제작하고 프로듀싱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될까? 의심하고 있는 단계다. 그러고 보니 <더 킬러스>를 홍보하면서 카프카를 많이 인용했었는데, 최근에 소속사 대표님과 이런 이야기를 했다. “카프카의 <변신>을 실험영화로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흑백 고전영화의 형식을 취하면서 재해석하면?” 내가 감독을 하고 싶다기보다는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되고 싶다. 그를 연기하고 싶다. 그런 것들을 내가 잘 기획하고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는 더 열심히 공부해보고 나서 생각하고 싶다. <더 킬러스>가 내 안의 어떤 벽을 허물어준 작품인 건 분명하다.
최근 <수상한 그녀>의 드라마 리메이크가 알려졌다. 출연작 가운데
<써니>와 <수상한 그녀>는 아시아 전역에서 히트했고, 해외 여러 국가에서 리메이크가 되었다. 이 작품들의 힘을 지금도 느끼는지?
<수상한 그녀>의 경우는 중국과 베트남 리메이크작의 초반 프로모션에 참여하기도 했다. <써니>는 친구들과의 우정을, <수상한 그녀>는 가족 이야기면서 한 여자의 삶을 표현하고 있다. 인간의 공통적인 경험을 다루어 공감하기 쉽다 보니까 리메이크가 많이 되었고 그 힘을 아직도 많이 느낀다. 두 작품 모두 개봉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명작으로 자리 잡아 가는 것 같아서 좋다. 배우로서 참 감사하다. 올해 여름이었나. 아는 업계 분과 얘기를 하다가 “<수상한 그녀>가 대표작으로 여겨지는 것에서 조금 벗어나고 싶다. 나는 더 다른 것을 보여주는 배우이고 싶다”고 했더니 그분이 말씀하셨다. 대표작을 남길 수 있다는 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니고, 쉽게 벗어날 수도 없다고. 지금까지는 <수상한 그녀> 시절의 이미지를 쇄신하려고 노력했는데, 이제는 그 자체로 바라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느낀다.
이제 30대다. 연기 경력 20여 년을 보내면서 10대, 20대, 30대의 얼굴이 모두 스크린에 새겨진 경험을 가진 배우이기도 하다. 스크린 속 30대 심은경의 얼굴은 어떤 모습으로 표현되기를 기대하나?
홍보성 발언이 아니라 정말로 <더 킬러스>를 통해 배우로서 보여주고자 하는 나를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오스카 와일드는 자기 자신이 너무 많이 담겨 있는 작품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라고 했는데, 내게는 <더 킬러스>가 그렇다. 지금의 나를 모두 담은 영화다. 예전보다 테크닉과 감성 면에서 더 무르익은 것들이 있을 테니 그것으로 다른 작품들을 잘 채워 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 인터뷰 때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하고 싶으냐는 질문을 받으면 항상 하는 얘기가 있다. 서동요 기법이랄까. (웃음) 일본만화 <몬스터>를 너무 좋아하는데, 거기 나오는 요한 같은 존재감이 있는 역할을 꼭 하고 싶다. 그런 캐릭터와의 조우를 계속 꿈꾸고, 언젠가 그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함께 읽으면 좋은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