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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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질 것 없이,
함께 살아가는 삶에 대하여

이미랑 감독 <딸에 대하여>

송아름(영화평론가)

아마도 닮아서, 그래서 나와 비슷할 것이라는 기대로 엄마와 딸 사이엔 자주 살얼음이 끼는지도 모른다. 쉽게 사라지기도 또 쉽게 얼어버리기도 하는 그 경계는 서로를 이해하는 듯하면서도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순간들 사이사이에 서다 녹기를 반복한다. 엄마가 생각하는 어려움을 딸이 겪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은 엄마의 기우이거나 나에 대한 오해일 뿐이라는 딸의 절규 앞에 날이 서고, 이렇게까지 이해하지 못하는 딸을 바라보는 엄마에겐 상처가 남는다. 잠시간의 냉각기 속에서 답답함이 남을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날을 세울 수 없음을 직감하는 것이 더욱 화를 돋우기도 한다. 이 잔여는 분명 풀리지 않을 테고 그럼에도 어느 쪽이건 설득하거나 설득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바로 그곳에 엄마와 딸이 있다. 김혜진의 동명 소설 <딸에 대하여>를 원작으로 한 영화 <딸에 대하여>는 바로 이 경계를 비집고 선 엄마의 답답함에 대해, 그것을 해소시키는 방식에 대해 천천히 풀어낸다.

덜 지쳐 보이지만 더 현실적으로

요양원에서 일을 마치고 집에 도착한 엄마(오민애)는 살고 있던 곳에서 갑자기 나가게 되었다며 엄마에게 손을 벌리는 딸(임세미)과 마주한다. 당장 도와줄 방법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집에 들어와 사는 것도 그리 내키는 일은 아니다. 엄마는 딸이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랑하는 이가 동성이라는 것을 알기에 굳이 목도하고 싶지 않은 탓이다. 그러나 새 집을 구할 방법을 찾지 못한 딸은 애인 레인(하윤경)과 함께 엄마의 집으로 들어오고 엄마는 그들의 삶을 어지럽게 바라본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모든 일에 딸은 열정적이었고 엄마는 세상에서 딸이 배제될 것 같은 불안에 자주 딸을 불러 세우지만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딸이 동성의 애인과 함께 엄마의 집으로 들어오고 엄마는 이들의 삶을 불안하게 바라본다.

엄마의 복잡한 마음을 훨씬 더 지친 듯 바스락거리는 감정으로 그렸던 소설을 생각한다면 영화는 이 긴장을 살짝 내려놓은 분위기를 택한다. 소설에서 엄마를 둘러싼 사람들과 환경은 엄마가 좀 더 예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만약 딸이 레즈비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대학교수가 아닌 강사라는 사실이 드러난다면, 엄마의 마음도 이를 알게 된 이들도 호의적일 수 없는 소설 속 주변인들도 영화에서 엄마의 요양보호사 동료 최여사(강애심)의 성격이 바뀐 것처럼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엄마가 일하는 요양원의 분위기도 엄마의 성격도 날카로움과는 거리를 두며 안정감을 주었고, 딸 역시 냉정하기보다는 다소 어려진 듯 엄마와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는 듯 에너지가 차 있었다. 영화와 소설의 내용은 거의 유사하지만 영화는 이처럼 살짝 녹은 듯한 분위기로 그들로의 접근을 편안하게 했다. 그렇다고 그들의 사이가 쉽게 가까워졌다거나 화해한 듯 보이게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안락함은 딸을 바라보는 엄마의 불안을 더 현실적으로 경험케 하는지도 모른다.

홀로 남는다는 불안과 연민

엄마가 딸을 집으로 들이는 것은 단순히 오랫동안 떨어져 살았던 딸과 부대껴야 한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딸과 함께 산다는 것은 딸을 자신이 지은 이름 대신 ‘그린’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서로 어떻게 대한다고 해도 불편하기 그지없는 딸의 동성 애인 ‘레인’까지 함께해야 하는 것이었다. 딸의 다그침과 같은 부탁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것, 엄마와 딸이 거리를 두고 대화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아무 일도 아닌 듯 이것저것을 해볼 수 없느냐는 딸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을 잇는 느린 리듬은 엄마의 고민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결국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때, 그리고 딸보다 먼저 집 앞에 찾아와 큰 트렁크와 함께 선 레인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을 때 한숨조차 쉬지 않는 엄마의 얼굴은 긴장과 마주할 준비를 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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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를 앓으며 요양원에서 홀로 지내는 제희를 바라보면서 엄마는 홀로 남는다는 것에 대한 공포를 마주한다.

<딸에 대하여>는 바로 이 굳은 얼굴을 딸에 대한 거부 혹은 실망으로 연결하지 않는다. 오히려 딸에 대한 냉정함은 불안이나 연민으로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엄마가 일하던 요양원에서 제희(허진)를 중요하게 부각시킨 것은 바로 이 연민과 불안의 출처를 드러낸다. 치매를 앓으며 요양원에서 홀로 지내는 제희를 바라보면서 엄마는 홀로 남는다는 것에 대한 공포를 마주한다. 과거에 남을 위해 무엇을 했든 얼마나 대단하고 좋은 일을 했든 간에 가족이 없는 제희에게 남은 것은 요양원의 절약 운영에 따라 바스라지는 것뿐이었다. 엄마는 제희의 살이 짓무르더라도 기저귀를 아껴야 하고 지원금이 끊기면 가족 없는 제희가 우선적으로 좋지 않은 환경으로 보내지는 수순, 그것이 바로 제희가 열심히 살아온 지난날의 결과라는 점에 분노하고 또 항의하지만 이를 저지할 방법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돌봐줄 가족이 없기에 이런 일을 겪는 제희의 모습에서 엄마는 자신을 보았고 또 딸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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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딸에게 레인과의 관계에 직접적으로 불만을 드러냈을 때 엄마가 제일 먼저 꺼낸 말은 가족에 대한 것이었다. 엄마는 “도대체 너희의 관계가 무엇이냐”고, “혼인신고를 할 수가 있는 것도, 자식을 낳을 수가 있는 것도, 그러니까 남들이 생각하는 바로 그 가족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닌 너희들의 관계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폭발하듯 물었다. 결국 “그렇게 만든 게 엄마 같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라는 딸의 일갈에 엄마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자신의 미래보다 남의 일에 투신하고 다치고 또 열을 올리는 딸은 더더욱 이해 밖이었다. <딸에 대하여>는 바로 이 사이를 레인을 통해 메우며 천천히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레인의 차분한 목소리나 주눅 들지도 흔들리지도 않는 태도는 엄마에게 둘 사이의 확신을 보여주고 있었다. 레인은 지금껏 어떻게 둘이 살아갈 방법을 찾아왔는지, 이렇게까지 했던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진지한 사이였기에 상당한 것들을 감수했다는 것까지 확고하지만 무례하지는 않은 태도로 엄마를 이해시킨다. 영화는 엄마와 레인의 불편하지만, 딸보다도 자주 이어지는 둘의 대화를 배치하면서 조금씩 레인의 말을 받아들이는 엄마를 그려 간다. 레인은 딸 그린이 미처 포착하지도 못했던 엄마의 컨디션을 챙기고 무엇이 필요한지를 먼저 알아채고 다가갔다. 둘은 점점 누군가 바라 마지않던 가족의 형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함께’에 대한 미세한 희망

엄마는 제희를 치매 환자만 수용하는 열악한 곳으로 보낸다는 요양원장의 결정에 끝까지 맞서다 일자리를 잃는다. 주변 사람들의 단념하라는 말은 엄마가 제희의 버려진 물건을 챙기고 그를 찾아 나서는 데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엄마는 적어도 의식이 있고 표현도 할 수 있는 제희를 눕혀만 두고 묶어 놓기까지 하는 곳에 둘 수 없다. 제희가 얼마나 잘 살아왔는지 알고, 제희와 함께 했던 시간을 생각해서라도,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외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마치 자신의 딸이 그랬던 것처럼. 엄마는 딸이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해고된 강사를 돕고자 학교와 맞서는 이유에 공감하지 못했다. 엄마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남의 일이었고 누가 다친대도 내 딸이 다친 것만 아니라면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딸이 다른 이와 함께 자신의 삶을 나누고 또 어려운 일을 도와 가는 바로 그 순간은 엄마가 결국 제희를 찾아 집으로 데리고 오는 순간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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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딸이 너무 튀지 않기를 바랐다. 딸이 이런 걱정을 이해하지 못할 때 엄마는 제희에게 “딸이 너무 공부를 많이 해서 힘들어진 것 같다”고 푸념처럼 늘어놓았었다. 평범하게 남들 사는 것처럼 잘살 수 있었는데 괜히 아는 것이 많아 스스로를 힘들게 한다는 엄마의 걱정은 굳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받아들일 때 별일 없이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의 다른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도 남들이 당연한 듯 받아들인 제희의 유기를 견디지 못한다. “가족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느냐”고, “한 분만 특혜를 주면서까지 무리한 운영을 할 수 없다”고 요양원장 나름의 논리로 설명한대도 누군가가 외롭게 사라질지 모른다는 그 상황을 엄마는 받아들일 수 없다. 자신의 일인 듯 제희에게 다가서는 엄마를 통해 <딸에 대하여>는 엄마와 딸과의 마주침을 좀 더 적극적으로 설명해낸다. 집으로 제희를 데리고 왔을 때, 딸도 레인도 왜 낯선 이를 집에 들이냐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엄마는 아마도 이들이 자신보다 쉽게 제희를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는지도 모른다.

이들의 이후가 명확히 그려졌기에 제희와 함께하겠다는 엄마의 결정은 결코 고집처럼 보이지 않았고 그렇게 또 하나의 가족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은 자연스레 다가왔다. 레인은 당연한 듯 제희의 매무새를 챙기고 엄마도 어색하지 않게 그 모습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딸은 함께 사는 이들이 좋아할 것을 사 와서 나눴고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아도 한 공간에 있는 것이 어색하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변해 가는 과정은 <딸에 대하여>가 누군가의 어려움이 내 일이 될 수도 있으니 도와야 한다거나 가족만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식의 사회적 당위에 관심이 없음을 드러낸다. 오히려 영화는 공감하고 함께하는 것, 이 모습이 가족이라는 틀과 무엇이 그리 다른 것이냐고 물으며 새로운 가능성이 분명히 남아 있음을 이야기한다.

물론 영화는 이 과정이 아름답게만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너무나 평온해서 마치 꿈결처럼 보이던 엄마와 딸, 그리고 레인과 제희의 모습은 제희의 죽음에 앞서 그려졌다. 동네 아이들과 장난을 치다가 잠든 제희를 깨워 정성스레 구운 빵을 나누고 함께 이야기하던 모습은 반복되는 제희의 잠든 모습을 통해 현실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표지를 남겼다. <딸에 대하여>가 제안한 세계는 바로 여기에 있다. 너무 쉽게 봉합을 그리지도, 그렇다고 가능성을 차단하지도 않은 미세한 희망. 아마도 이것이 우리가 ‘함께’를 유지할 수 있는 방식일지 모른다. 제희가 세상을 뜬 후 딸의 친구들이 당연하듯 제희의 장례식장에 왔던 것처럼, 가족은 함께한 시간이나 핏줄의 연과 인연을 맺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사이에 앉은 딸을 편안히 바라보거나 시간이 흘러 어느 횡단보도 앞에서 친해 보이는 두 여학생을 바라보며 미소를 띠는 엄마의 얼굴은 <딸에 대하여>가 천천히 이해를 구하고 있는 이 모든 것이 그리 먼 일도 특별할 일도 아니라는 점을, 그렇지만 누군가를 오롯이 채워줄 수 있다는 점을 충분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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