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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우리는 모두 누군가 필요하다”

<대도시의 사랑법> 이언희 감독  

김혜선(웹매거진 한국영화 편집장)
사진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은 각각의 결핍과 소외를 지닌 두 남녀 재희(김고은)와 흥수(노상현)의 사랑과 우정에 관한 이야기다. 이언희 감독이 연출을 맡아 박상영 작가의 소설
<대도시의 사랑법> 가운데 단편 ‘재희’를 영화로 옮겼다. 거칠 것 없이 사람을 사랑하는 재희는 보호필름을 입은 듯 성 정체성을 감추며 사랑해야 하는 흥수에게 “네가 너인 게 네 약점이 될 수는 없어”라고 말한다. 그렇게 나를 나로 받아들여주는 관계의 소중함을 청춘의 얼굴로 외친다. 2003년 영화 <...ing>로 데뷔해 20년간 다양한 장르에서 스스로를 증명해 온 이언희 감독의 연출은 뜻밖에도 귀엽고 사랑스럽다. 이제야 자신이 꾸준히 하고 싶어 했던 이야기가 무엇인지 깨닫고 있다고. 한 명의 감독이 자기 세계를 찾아가는 과정은 한 명의 청춘이 성장하는 과정과 그리 다르지 않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어떤 나이로 어떤 시대를 살더라도 중요한 건 ‘내 곁에 있는 이들에 대한 이해’임을 잘 알고 있다.


재희와 흥수의 공간.

Q

박상영 작가의 소설 <대도시의 사랑법> 중 단편 ‘재희’를 영화화했다. 이 단편이 왜 가치 있다고 여겼나.

A

박상영 작가님의 소설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대도시의 사랑법>도 그래서 읽기 시작했는데 그중 ‘재희’는 조금 특별했다. 다 읽고 친구에게 전화해서 “이건 뭔가 여성과 남성의 파트너십으로 영화를 재밌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면서 신나게 떠들었던 기억이 난다.


Q

재희와 흥수, 둘의 이야기가 지금 세대를 위한 <섹스 앤 더 시티> 같다는 느낌이다.

A

당연히 그 생각을 했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는 워낙 엄청난 캐릭터였으니까. 한국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도 있다고 봤다.


Q

최근 연출작이었던 JTBC의 드라마
<살인자의 쇼핑 목록>(2022)과 크리에이터로 참여한 디즈니+의 시리즈 <킬러들의 쇼핑몰>(2024)은 둘 다 원작 소설이 있다. <대도시의 사랑법>의 원작 소설까지 생각하면 선택하는 소설 장르의 폭이 넓다.

A

일단 많이 읽는다. 영화나 드라마 하기 좋은 소설을 골라 읽는 건 아니고, 대부분 도서관에서 ‘이거 재밌겠네’ 하고 빌린다. 약간 활자 중독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애였다. 화장실에서 샴푸 뒷면을 읽는.(웃음) 기본적으로 소설을 좋아한다. 더 지적인 책을 읽어보려고 노력 중이긴 한데, 그건 항상 쌓여 있고 결국에는 소설을 읽고 있다.(웃음)

<탐정: 리턴즈>(2018)를 연출하고 나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다음은 무슨 장르를 하고 싶냐”였다. 나는 매번 “장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안에 무슨 얘기가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답했었다. 항상 이야기에 충실하려고 한다. 추리물도 스릴러도 좋아하지만, 그래도 주인공은 뭐가 되었든 내가 동의할 수 있는 캐릭터여야 된다는 것, 그리고 감정이라든가 서사에서 느껴지는 관계를 더 얘기하고 싶었다.


Q

그렇다면 ‘관계’는 데뷔작 <...ing >(2013)와 <미씽: 사라진 여자>(2016)에서 <대도시의 사랑법>에 이르기까지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는 단어인가?

A

그렇다. 연출작이 이 정도로 쌓이니까 내 자신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보이기 시작한다. <...ing >로 데뷔했을 때 투자사에서 어떤 감독이 되고 싶으냐는 질문을 하셨는데 이렇게 대답했다. 두세 편은 더 찍어봐야 알겠다고. 그리고 지금은 내가 2명 이상의 관계에서 뭔가 서로 성장하는 이야기를 정말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게 너무 재미있다.

Q

영화에는 소설보다 훨씬 다채로운 장면들이 등장한다. 재희와 흥수의 대학 시절 이야기, 재희의 사회생활, 남자친구의 집착과 폭력, 흥수와 구찌 이야기 등. 원작이 짧은 단편이다 보니 각색 단계에서 영화엔 어떤 이야기들을 채워 넣어야겠다고 판단했나?

A

결국 핵심은 재희와 흥수의 관계였다. 서로 영향을 받으면서도 각자 성장하는 이야기니까, 그들은 13년 동안 각자 많은 일들이 있었던 거니까, 자연스럽게 열심히 채웠다. 조금 넘칠 정도로. 사실
<대도시의 사랑법>의 단편 ‘재희’를 영화로 만들기 위해 기획하고 판권을 사는 과정에서 일종의 팀이 꾸려졌다. 나를 포함해 제작자, PD, 시나리오 작가 등 5명의 여성이 1년 정도 함께 이 작업을 위해 계속 수다를 떨었다. “나는 이런 일이 있었다”, “누구는 이랬다더라”. 그렇게 나눈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담겼다.

Q

재희와 흥수는 MZ(밀레니얼+Z) 세대인데, 그들의 대학 시절은 살짝 1990년대의 문화가 엿보인다. 시대가 혼재되어 있다.  

A

당연히 고민했고 2010학번을 기준으로 삼긴 했다. 제작진 중에 10학번이 있기도 해서 계속 묻고 확인했다. 내 경우는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를 다녔고 심지어 내가 1기여서 학생 수도 적었다. 일반 대학을 안 나와서 일반 대학 축제를 졸업하고 처음 가봤다. 그런 기억들을 끄집어내기도 하고, 내가 경험하지 못한 부분은 다른 이들에게 얻어내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것은 당시 학교마다 분위기가 달랐다는 것이다. 여학생들의 흡연도 한예종은 그냥 교실에서 편하게 피는 분위기였다. 오히려 일반 대학을 나온 10학번 친구가 지금 영화 속에 표현된 것 같은 대학 분위기를 경험했다고 하더라. 그러니까 누구 하나의 경험을 기준으로 삼아서 “지금은 이렇다”는 결론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결국 우리가 좋은 대로 해보기로 했다.

나는 집안 내력이 기관지가 약하다. 그래서 담배를 안 핀다. 그런데 사람들이 한예종 때 내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봤다는 거다. 한예종 분위기상 담배를 안 피는 여학생이 서너 명 정도밖에 안 되긴 했지만. 나는 담배를 안 피우는데 내가 담배 피운 걸 봤다니, 이 직업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런 얘기를 하고 싶어서 이 영화를 만든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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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재희의 세계는 비교적 접근하기 쉽지만 흥수의 세계는 낯설지 않았는지? 

A

완전히 낯설었고 가장 큰 난관이었다. 몰라서 더 조심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 세계를 알고 있는 친한 친구들이 있기 때문에, 그 친구들을 보면서 제가 느꼈던 것들이 영향을 줘서 이 영화를 만들게 되었기 때문에, 흥수의 세계를 묘사할 때 뭔가 잘못된 것을 전달하면 안 된다는 고민이 컸다. 실제로 친구들이 많이 도와줬다. 그들에게 많이 혼나기도 하고. 찍은 컷을 본 후에 해석도 다양하게 해주었다. 드라마 <살인자의 쇼핑목록>부터 함께해 온 김형주 촬영감독의 도움도 컸다.

Q

각색을 통해 캐릭터와 이야기, 구조가 새롭게 재탄생하는 것을 보는 재미가 크다.  

A

원작을 영화화하면서 원했던 건 재희와 흥수가 여성 혹은 성소수자를 대변하기보다 그냥 흥수는 흥수고 재희는 재희로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나조차도 뭔가 여성 감독을 대변해야 하는 상황이 너무 피곤하다. <살인자의 쇼핑목록>을 찍을 당시에 있었던 일이다. 로케이션 헌팅을 간 곳에서 제작팀이 어떤 분에게 나를 감독이라고 소개하니, 그분이 “여자 감독은 촬영 오래하고 피곤한데”라고 했다. 그 순간 내 주변은 전부 남자 스태프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나일 뿐이다. 재희와 흥수도 그런 것 같다. 좋은 캐릭터들은 개별적인 특성을 가져야 개성이 생기는데 한편으로 대중적인 보편성도 요구된다. 이 두 요소를 함께 가져가는 게 어렵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개별성이 있어야 보편성도 확보되는 것 같다. 실제 존재하는 사람처럼 보여야 관객이 그 캐릭터를 이해하려고 한다. 두리뭉실해지면 그 캐릭터가 잘 안 보이게 된다. 흥수에게도 여러 키워드들이 있지만 그래도 결국 이 영화는 청춘 성장 영화였으면 좋겠다, 그런 방향이 모두를 관통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결론을 내렸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재희와 흥수라는 캐릭터로 표현한
청춘 성장 영화이다.

Q

원작의 신랄하고 발칙한 대사들과 영화만의 대사들도 적절한 비중으로 살아 있다. 그런데 캐릭터를 보자면 재희는 원작보다 훨씬 여린 면을 보여준다.

A

원작을 기반으로 시나리오 작업을 했던 초기 버전에서는 재희라는 인물이 잘 안 보였다. 흥수는 알겠는데 재희는 ‘뭐지?’ 싶었다. 그래서 찾아낸 것들이 재희의 여린 모습이었다. 학내에 재희가 나온 노출 동영상이 있다는 소문이 퍼진 후, 강의실에서 내가 아니라며 상의를 들어 올려 가슴을 보여주고 나갈 때 재희의 뒷모습 같은 것. 그때 재희가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다. 소설에서 내가 찾고 싶던 재희의 모습이었다. 내가 재희라는 사람을 더 알고 싶었던 것 같다. 실은 제작자에게 영화화를 제안할 때도 “나는 솔직히 <대도시의 사랑법>이 훌륭한 여성 영화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면서 설득했다.(웃음)  

재희는 뭔가 화려하고 ‘센 여자’로 보이지만 엄청 여린 면이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기 힘든 캐릭터다. 편집할 때 촬영감독이 “어려운 여자 캐릭터를 선택한 것 같다”고 하더라. 재희에 대해서 “강하고 세서 뭔가 의지하고 싶은 언니를 보고 싶다”는 의견도 있었다. 옛날 영화지만 스물아홉 살 동갑내기들의 사랑과 우정을 그렸던 <싱글즈>(2003) 같은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장진영 배우와 엄정화 배우가 했던 역할을 보면 주인공은 장진영 배우가 맡은 캐릭터다. 엄정화 배우의 캐릭터가 훨씬 매력적이고 내게 친구를 선택하라고 하면 엄정화 배우의 캐릭터를 택하겠다. 하지만 장진영 배우의 캐릭터가 주인공인 이유가 있고 더 눈길이 간다. 뭔가 연약한 면이 있어야 더 잘 이해가지 않나. 우리는 모두 다 누군가가 필요하다.

재희는 발랄하고 발칙하지만 원작과는 달리
여린 모습이 드러나는 캐릭터이다.

Q

이야기는 재희와 흥수의 스무 살 시절부터 서른셋의 시점까지 13년의 연대기를 시간 순으로 이어 나가는 구조다.

A

원작 소설에서 재희의 결혼식에서 시작해, 첫 만남부터 13년이 흘러가는 방식은 처음부터 확신이 있었다. 그 구조를 바꾸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고민은 13년의 세월을 어떻게 채우느냐였다. 13년을 다큐멘터리처럼 보여줄 수는 없어서 몽타주 장면들로 표현했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몽타주가 중요하게 사용되길 바랐던 영화고, 촬영감독에게도 중요한 미션이었다. 진짜 힘들었다. 몽타주 신을 위해 준비한 의상만 200벌 정도 된다.

Q

김고은과 노상현의 얼굴로 재희와 흥수가 살아 움직일 때를 가장 만끽할 수 있었던 장면이 있었다면?

A

재희의 집 안 장면을 세트에서 찍었다. 초반에 재희와 흥수가 부대찌개 먹으면서 소주를 마시는 장면이 있는데, 두 배우가 알아서 잘해주더라. 그때부터 둘이 함께 있으면 너무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부대찌개는 진짜 맛집에서 공수해 온 거다. 세트 밖에서 소품팀이 계속 끓이고 있었다. 배우들 특히 노상현 배우가 맛있다고 먹다가 나중에는 너무 많이 먹어서 힘들어할 정도였다. 그 장면 보고 관객도 허기지길 바랐다. 그게 곧 영화로의 이입이니까.

집에서나 밖에서 먹고 마시는 장면은 관객도 허기를 느끼도록 몰입을 유도한 장면이다.

Q

주요 배경인 재희의 집은 재희와 흥수 모두에게 중요한 공간이다. 자취하던 20대의 시절이 온전히 깃들어 있고, 특히 흥수가 작가가 되게 만든 공간이기도 하다.

A

개인적으로 자취를 못 해봐서 내 꿈을 실현하는 것 같은 로망도 있었다. 하지만 너무 개연성이 없으면 안 된다는 점은 고려했다. 교통이 불편하고 언덕 위에 있는 집으로 정하고 로케이션 헌팅을 하면서 집값이 저렴할 수밖에 없는 전망과 주변 환경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찾은 곳이 이태원이다. 다른 지역은 집 모양이나 높이는 충족이 되어도 집장사들이 뭔가 찍어낸 것처럼 보이는 동네가 많았다. 특유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없었다. 그게 도시 룩의 큰 차이를 만든다. 그래서 결국 이태원에서 찍어야 했다. 실은 재희의 자취집이 재희와 흥수가 다니는 대학교 근처냐 이태원이냐를 놓고도 고민했다. 재희라면 학교에서 거리가 있고 언덕을 올라야 하더라도 자유로운 이태원을 선택할 것 같았다.

인기 일러스트레이터 작가 NOMA(노마)와 협업한 영화 속 재희와 흥수의 동거 하우스 이미지
재희의 집 밖, 그리고 집 안의 풍경. 재희의 동네는 재희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이태원으로 설정했다.

Q

영화엔 이성애자 남성들보다 동성애자 남성들이 훨씬 매력적이고 사려 깊게 묘사된다.

A

이전 작품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 이성애자 남성 캐릭터들이 주인공이 아니다 보니, 그만큼 깊이 있게 표현되지 않아서 더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곽동연 배우가 맡은 캐릭터는 부모님의 압박에 시달려서 어쩔 수 없이 의대에 갔는데 사실은 농구를 좋아하는 남자라는 다른 측면을 부각시킬 수도 있었다. 단순하게 묘사되어서 손해 보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앞서 거론했던 <섹스 앤 더 시티>가 레퍼런스 역할을 했던 게, 주인공 캐리 브래드쇼가 만나는 남자들이 다 엇비슷하다. 연애라는 게 사실 하다 보면 나쁜 면들이 보이니까 끝나는 거잖나. 편의적으로 사용된 측면이 있는 남성 캐릭터들을 배우들이 워낙 잘 연기해주셔서 그런 느낌이 더 컸던 것 같다. 감사할 뿐이다.(웃음)

Q

재희와 흥수처럼 나를 나로 가감 없이 이해하고 받아들여주는 관계는 이 시대에 굉장한 판타지일 수도 있다.

A

맞다. 그런 관계가 나의 로망이자 희망이다. 심지어 첫 영화인 <...ing>까지 거슬러 가보니, 나를 사랑해주는 누군가의 존재만으로 내 삶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해질 수 있다는 얘기를 계속해서 꿈꿔 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계속 이 꿈을 꾸고 있다. 나 자신을 완전히 아는 타인을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수 있다. 그냥 나를 포용하고 아껴줄 수 있는 정도면 정말 엄청난 관계라고 생각한다.

나를 나 자신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주는 타인, 재희와 흥수의 관계는
이 시대의 판타지이기도 하다.

Q

<...ing>부터 <미씽: 사라진 여자>
<탐정 리턴즈>에 이어 <대도시의 사랑법>으로 한국 대중상업영화의 여러 장르를 두루 경험하면서 자기 증명을 해낸, 드문 여성 감독이다. 무엇이 그걸 가능케 했을까?

A

운이 좋았다. 물론 어떨 때는 무척 나쁘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웃음) 나는 약간 운명론자다. 내 영화는 항상 주어진 운명은 있지만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최선을 다하면 뭔가 엄청난 걸 바꿀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앞으로 나아갈 수는 있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그렇게 된다는 건 실은 진짜 운이 좋은 거다.

한국영화계에서 젊음과 여성이라는 것이 새로움으로 인식될 수 있는 시기에 20대 후반의 나이로 감독 데뷔를 할 수 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주변에서 한 번 더 데뷔할 수 있는 나이라고 했다. 이제 마흔이 훌쩍 넘어서 데뷔하는 감독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것만 보더라도 지금 운이 좋았던 거였다. 그다음에는 부침이 있었지만 어떻게든 기회들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일까. 내가 당연히 어떤 이들을 대변할 수는 없는데, 요즘에 조금씩은 인정하는 것 같다. 책임감은 조금 더 있어야 하겠구나.

영화 찍는 게 너무 지겹고 너무 힘들 때가 있다. 영화가 정말 싫어서가 아니라 너무 힘이 들어서 하기 싫다고 느껴질 때. 그런데 너무 많은 분들이 이 일을 꿈꾸는 걸 볼 때 반성하고 열심히 해야겠구나 싶었다. 올해 초까지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위원을 하면서 느낀 것이기도 하다. 그동안 온통 나만 생각하다가 주변을 보게 되었다.

이언희 감독의 전작들. <...ing>|(주)튜브엔터테인먼트,
<미씽: 사라진 여자>|플러스엠, <탐정 리턴즈>| CJ ENM

Q

올해는 작품을 개봉하는 여성 감독들의 수가 눈에 띄게 적어서 살짝 부담감이나 책임감을 느끼는 것 같다. 마찬가지인가?

A

실은 불안감일 거다. 책임감보다는 불안감. 극장 상황이 좋아져야 할 텐데. 2023년에 <대도시의 사랑법>을 찍었는데 그때 찍으면서 그해 10월까지 30억 이상의 영화가 12편뿐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지금 그 12편 중에 하나를 찍고 있으니, 열심히 해야 된다 싶었다.

Q

<대도시의 사랑법>은 순제작비 52.5억 원의 중예산 영화다. 한국영화의 중간, 허리가 되는 규모의 작품들은 그 자체로 반갑다. 허리가 되는 영화들이 더 많이 만들어지기 위해 영진위가 해야 할 일, 혹은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A

2016년 찍었던 <미씽: 사라진 여자>의 제작비가 29억이었다. 지금은 물가가 너무 오르고 인건비도 올라서 예산은 늘었지만 현장에서의 체감은 <미씽: 사라진 여자> 때와 비슷하게 어렵다. 결국 다양한 영화들에 대한 존중과 기대를 갖고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수밖에 없다. 영진위에서 지원을 받아서 만들어진 훌륭한 영화들이 너무 많지 않나. 사실상 한국영화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영진위가 잘 버텨줬으면 좋겠다. 독립영화는 여러 기관에서의 지원금을 합쳐서 만드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상 영진위의 지원이 아니면 만들어지기 어렵다. 문화의 힘을 더 믿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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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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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희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