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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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Record

충무로, 남양주, 부산까지

K-영화촬영소의 역사

유동주(머니투데이 기자)

History Record는 인물, 배경, 상황 등 다양한 키워드를 주제로 한국영화를 다각도로 조망해 보는 코너다.


한국의 영화촬영소(스튜디오) 역사는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 설립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영화인들과 극장들이 충무로에 모여든 것은 영화 제작사들뿐 아니라 촬영장도 부근에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영화 산업이 태동했지만 대형 촬영장이나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공적 역할을 하는 곳은 없었다.

남산 테니스장에서 시작된 충무로촬영소

이른바 ‘충무로 시대’가 시작된 것은 해방 후의 일이다. 국방부 영화촬영대가 전쟁 중에 남산골 한옥마을에 위치한 수도방위사령부 뒤편 관사에 부산에 있던 시설과 기재를 옮겨와 지하는 촬영장으로 사용하고 그 옆의 테니스장은 야외 촬영장으로 활용하면서 ‘필동촬영소’, 즉 ‘충무로촬영소’가 시작되었다.

제작 편수가 연간 수백 편에 달했던 1960년대 한국영화의 황금기와 1970년대 전성기는 충무로촬영소를 기반으로 이룰 수 있었다. 영화법 제정에 이어 1971년 최초의 영화진흥정책 기구인 영화진흥조합 설립, 그리고 이어진 1973년 영화진흥공사 창립은 우리 영화 역사에서 중요한 변곡점이다. 국가 주도의 영화진흥정책의 본격화에 접어들었고 제대로 된 공적 영화촬영시설을 갖추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1976년 남산 중턱에 있던 구(舊) KBS사옥을 인수해 업무를 시작했던 영화진흥공사는 한국영화 제작의 메카였다. 조명기, 촬영기, 특수차량, 발전기, 강우기를 포함한 촬영 기자재 대여는 물론이고 특수촬영실, 세트장, 녹음실, 그리고 현상실까지 영화 제작에 직접적으로 필요한 제작 환경을 제공했다. 특히 특수촬영실과 돌비 서라운드 시스템을 갖춘 녹음실, 특수광학효과를 낼 수 있는 현상실 등은 영화진흥공사에서만 갖추고 있어 이런 작업이 필요한 영화를 만드는 제작사들은 이곳을 거쳐야만 했다. 한 곳에서 후반기 작업인 녹음, 편집, 현상도 가능한 유일한 장소로 국내 대부분의 영화사들은 이곳에서 영화를 완성했다.

할리우드를 꿈꾸다, 남양주종합촬영소

영화진흥공사가 경기도 남양주에 종합촬영소를 만든 것이 대전환의 시작이었다. 그간 영화 제작을 허가받은 영화사들이 자체 스튜디오를 운영하기도 했지만 그 규모가 영세해 대형 영화를 제작하기엔 무리였다. 따라서 영화인들은 미국 할리우드를 꿈꾸며 한국형 대형 스튜디오를 바라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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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경비구역 JSA>의 판문점 세트.
경기도 파주시 판문점 군사분계선 구역을 완벽하게 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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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종로 거리를 고증한 민속마을세트

이러한 영화 업계의 바람과 대형 영화 촬영장이 필요하다는 당시 정부의 인식과 의지가 만나서 남양주종합촬영소 건립 계획이 시작되었다. 21세기 전략 산업으로 영상 산업을 육성한다는 정부 계획하에 이루어진 투자였다. 남양주종합촬영소는 1992년 4월 17일 첫 삽을 뜬 지 5년 6개월여 만인 1997년 11월 5일 준공식을 열 수 있었다.

경기도 남양주 조안면 일대 40여만 평의 부지에 650억 원의 공사비를 투입해 만든 종합촬영소는 대형 및 중형 스튜디오와 특수촬영 스튜디오, 2개 동의 소형 스튜디오와 고정촬영세트장 등을 갖추어 당시로선 최고의 현대식 영화촬영시설이었다. 예상보다 늘어난 공사 기간 때문에 전체 완공이 되기 전이었던 1993년 말부터 일부 시설에서 영화 제작을 시작하면서 한국영화 제작 편수의 절반 정도는 감당하고 있었다. 그만큼 영화 제작 현장은 환경이 열악했고 그 가운데 마련되고 있던 남양주종합촬영소는 영화인들에겐 꿈의 공간이었다.

전체 공간은 4개 동의 촬영용 스튜디오와 녹음편집 스튜디오, 영상박물관, 고정촬영세트, 야외 오픈세트장 등으로 구성되었다. 3만여 평 규모의 야외 오픈세트장은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있던 전통한옥을 이전·복원해 놓은 운당(雲堂)여관을 포함해 압도적 크기였다. 운당여관은 국악인 명창 박귀희 씨가 사들인 뒤 바둑대회가 자주 열리던 ‘바둑의 성지’였다. 이후 부지가 팔려 헐리게 되었다는 소식에 김동호 당시 영화진흥공사 사장이 남양주종합촬영소 부지에 옮기기로 하고 부자재를 해체해 동구릉에 보관하다가 몇 년 후 남양주에 그대로 이축하면서 재현할 수 있었다. 2002년 칸국제영화제 감독상을 받은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이 바로 운당여관 세트장에서 촬영되었다.

운당여관 세트장에서 촬영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취화선>
| 사진 출처 (주)시네마서비스

실내 촬영용 스튜디오는 특수촬영용, 영화 전용과 TV 겸용 등으로 다양하게 갖췄다. 그중 특수촬영 스튜디오는 바다나 호수, 강 등에서 일어나는 장면을 미니어처를 이용해 찍을 수 있도록 수심 1.2m의 풀도 갖췄다. 녹음과 편집에 관한 모든 설비도 최신으로 구비했다. 이곳은 영화 외에 TV, 광고 업계도 영상을 촬영하는 주요 공간으로 활용했다. 서울 인근이면서도 조용한 곳에 위치해 동시녹음 촬영에 최적의 조건을 갖췄고 주변 경관도 수려해 촬영지로서는 최적이었기 때문이다.

노태우 정부 당시 문화부 장관이었던 이어령 선생이 영화진흥공사의 추진 계획을 보고하고 대통령의 허가를 얻어 이뤄낸 남양주종합촬영소 건립은 한국영화 현대화에 크게 기여했다. 이후 부산국제영화제도 성공적으로 이끈 김동호 전 사장의 추진력과 의지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이곳 스튜디오에서 첫 번째 촬영하는 행운을 차지했던 영화 <투캅스>(1993)는 서울 관객 수만 86만을 기록하며 당시 한국영화 역대 흥행 2위(1위 <서편제>, 3위 <편지>)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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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종합촬영소 스튜디오 촬영 1호 영화 <투캅스>
| 사진 출처 (주)시네마서비스

남양주종합촬영소는 특수촬영을 다양하게 할 수 있는 기반 시설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제작사들이 훨씬 싼 비용으로 세트촬영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면서 영화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영화의 비현실성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세트장이 필수인데, 남양주종합촬영소는 그런 설비를 민간 제작사들이 쉽게 이용하는 계기를 만들어 한국영화의 국제무대 진출에 도움을 줬다. 그 당시 영화인들에게 남양주종합촬영소는 미국 유니버설 스튜디오와 같은 존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여 년간 한국영화 산업의 요람으로 기능했던 남양주종합촬영소의 야외 세트장은 많은 관광객들이 찾은 관광 명소이기도 했다. 특히 <취화선><공동경비구역 JSA> 세트장은 촬영소를 찾는 이들에겐 색다른 영화 속 공간으로 인기를 얻었다. 인근 남양주의 여러 맛집들과 함께 주말 나들이 코스로도 선호되었던 곳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있는 듯한 촬영소 내 세트장의 공간은 관람객들에게 색다른 비현실성을 주고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환상을 갖게 했다.

새로운 시대의 촬영 메카, 부산기장촬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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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장촬영소 투시도

지난 7월 18일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의 부산기장촬영소가 부산광역시 기장군에서 착공식을 가졌다. 2005년 영진위의 부산 이전이 결정된 이래 무려 20년 만이다. 애초엔 2023년 2월 기장군의 경관심의에서 조건부 통과되며 같은 해 7월 착공이 유력했으나 공유재산법상의 문제점 등이 돌출되어 지연된 바 있다. 영진위, 부산시, 기장군은 극적으로 ‘부분 매입·분할 상환’ 방식의 합의에 도달해 위기를 타개하고 착공을 할 수 있었다. 영진위 본사와 산하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이어 부산기장촬영소 착공식까지 마치면서 영화·영상 인프라의 부산 이전 작업은 일단락된 셈이다. 남양주촬영소에 이어 새로운 촬영 메카가 될 부산기장촬영소는 2027년 오픈 예정이다. 완공되면 부산은 그야말로 한국영화 산업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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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부산기장촬영소 건립사업 실시 협약식

2026년 9월로 예정된 부산기장촬영소의 1단계 완공 목표는 대지면적 24만6880㎡, 건축 연면적 1만2631㎡ 규모의 실내 스튜디오 3개 동과 소품 및 세트를 제작하는 아트워크·제작 지원 시설, 오픈 스튜디오의 완성이다.

부산기장촬영소가 완성되면 부산은 영화 제작에 있어서도 중심 기능을 담당할 것으로 보인다. 현대적 종합촬영소를 바라던 한국영화인들의 오랜 바람이 실현되는 셈이다. 그간 부산에서 많은 영화와 시리즈의 야외 촬영이 이뤄져 왔지만 스튜디오가 없다는 점은 큰 아쉬움이었기 때문이다. 부산에 둥지를 튼 영화 제작사들도 적지 않은데, 역시 스튜디오 촬영이 어려워 다른 지역을 전전해야 했다.

영상도시를 완성하는 마지막 한 수

부산기장촬영소의 공식 명칭에는 ‘기장’이라는 지명을 넣기로 했다. 지난 10월 22일 영진위와 부산 기장군은 ‘제1단계 사업부지’ 매매계약서에 촬영소 명칭을 ‘부산기장촬영소(KOFIC BUSAN GIJANG STUDIOS, KBG STUDIOS)’로 명시했다. 위치가 부산 외곽인 기장군에 있다는 점을 드러내고 지역주민의 자긍심을 반영한 것으로 읽힌다.

기장군엔 이미 롯데월드 어드벤처 부산이라는 대형 테마파크, 오시리아 단지 내에 아난티 코브와 아난티 앳 부산 빌라쥬 같은 대형 리조트와 골프장, 그리고 롯데몰 동부산점과 신세계 프리미엄 아울렛 등 관광 시설이 즐비하다. 부산기장촬영소가 완공되면 이 지역은 K-영화와 K-드라마를 낳는 첨단 영상 단지로서의 기능뿐 아니라 주변 관광 스폿과 연계해 유니버설 스튜디오 같은 관광명소의 역할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영화·드라마 촬영 등 제작 과정의 전 과정이 이제는 수도권뿐 아니라 부산에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마칠 수 있게 될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부산은 영상도시로 영화 인력을 키우는 한국영화아카데미가 있고,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며, 영화제 관련 시설인 BIFF와 영화의전당, 그리고 영진위가 자리 잡고 모여 있다. 영화를 배우고, 기획하고, 만들고, 즐기고, 연구하고, 지원하는 분야를 다 갖춘 이곳에서, 부산기장촬영소는 영상도시를 완성하게 하는 마지막 한 수다.

정부도 부산이 세계적인 영화의 도시로 커 갈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방침이다. 유인촌 문화체육부 장관은 올해 국감에서 “부산이 확실하게 영상도시로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계획을 갖고 있다”며 “독립영화관부터 영화와 관련된 모든 것을 부산에서 기획하고 만들며 유통까지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세계 주류에 이미 편입된 K-영화는 부산기장촬영소 완공을 기점으로 새로운 도약을 예고하고 있다. 50여 년의 업력을 지닌 K-영화촬영소의 역사 또한 부산기장촬영소와 함께 다시 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