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cover img

Reading

사랑의 흔적, 기억의 자리

이진영 감독의 <하와이 연가>

김필남(영화평론가)
사진
CGV ICECON, 나우 프로덕션
한인 디아스포라, 대양을 건너다

평화로운 풍경에는 어떤 긴장이 함축되어 있다. 이 긴장은 역사적인 동시에 개인적이다. 또한 역사에 정박되어 있기보다 현실에 스며 있기 일쑤다. 하와이의 자연 경관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음악이 울려 퍼진다. 음악 속에는 침묵과 비명이 묻혀 있다. 바닷속에서 이름 모를 누군가의 죽음들이 아우성친다. 그 에너지들이 거대한 ‘대양’을 이루고 있음을 느낀다. 바다에서 바다로 이어진 자리에는 아직 애도하지 못한 어떤 슬픔들이 있다. 슬픔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의 내면에는 일종의 해저와 심연을 만들어 놓고 ‘너’와 ‘내’가 서로 이어질 물길이 만들어지기를 절절하게 요구하고 요청하는 역사가 있다.

노오란 나비 한 마리가 날개를 펄럭거린다. 반짝거리며 위태롭지만 힘차게 바다를 건넌다. 나비의 날갯짓도 바다의 울렁거림마저도 눈부셔서 어쩐지 아련하고도 서글픈 시작이다. 121년 전 꿈과 희망을 찾기 위해 고국을 떠난 사람들의 흔적을 발견하지만 끝없는 심연으로 빠져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아직 그들의 역사를 모르고, 그들의 이름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진영 감독의 다큐멘터리 <하와이 연가>는 미주 한인 디아스포라의 역사가 1903년 하와이 호놀룰루 선착장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알린다.

1902년 12월 22일, 121명의 조선인들은 일제의 만행으로 빚어진 가난과 폭력 등으로 인천 제물포항에서 배를 탄다. 고국을 떠난 그들은 희망을 떠올리며 22일을 버틴다. 머나먼 타국에 도착한 건 102명. 그 사이 19명의 죽음이 있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고된 노동을 시작한다. 고국을 떠나왔지만 고국의 사랑을 멈추지 않았던 그들의 이야기가 덤덤히 펼쳐진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미주 한인 디아스포라의 역사가 아름다운 섬 하와이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image
역사는 지체하지 않고 흐른다

평온한 풍경, 푸른 바다. 휴양지 또는 신혼여행지라고 생각했던 하와이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우리의 역사가 담겨 있다. 열악한 노동 환경에 놓여 있던 노동자가 있었고, 차별과 편견을 겪으며 살아내야 했던 사람들이 있었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마음을 보탰던 투사가 있었다. <하와이 연가>는 결코 녹록지 않았을 하와이 삶을 살아낸 이민자 1세대의 이야기를 따스한 시선으로 따른다. 옴니버스 식으로 진행되는 영화는 ‘그들의 발자취’, ‘할머니의 놋그릇’, ‘칼라우파파의 눈물’로 이어지는 세 개의 에피소드로 진행된다. 고국에서 신부를 데려와 가족을 만들었고, 이방인의 나라에서 만난 중국인, 포르투갈인, 일본인, 필리핀인 이민자들이 모여 자신들의 공동체를 꾸렸으며, 타국에서도 고국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는다. 그들은 먹고 살기 힘든 와중에도 고국의 독립을 위해 독립기금을 마련해 보낸다. 먼 곳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노라고 말한다.

영화는 이민자들이 하와이에서 어떻게 자리 잡았는지를 구체적으로 재연하지 않는다. 달리 말해 그들이 얼마나 척박한 환경에서 견뎌내 하와이 공동체를 만들었는지, 고단한 노동을 어떻게 견뎌왔는지를 전달하는 데 애쓰지 않는다. 영화는 한 편의 시(詩)를 쓰듯 섬세하면서도 은유적으로 그들의 역사를 전달한다. 이때 보여주고 들려주지 않는다고 해서 이민자들의 삶이 녹록했을 거라는 착각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알고 있다. 이방인을 환대하는 이는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면 하와이 이민자들의 삶은 생각보다 더 힘겨웠을 것이다.

이진영 감독은 이민자들의 역사를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오래도록 기억하게 만드는 방식을 택한다. 잊힌 선조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기 위해 카메라는 세계적인 음악가로 성장한 후손들이 직접 연주하는 음악을 들려준다. 마치 그들의 넋을 위로하겠다는 듯 연주에 혼을 싣는다. 아름다운 음악은 환상적인 풍광과 조화를 이뤄 더 애틋하다. 아름다운 음악 소리와 환상적인 풍경은 과거(역사)로 돌아가게끔 만든다. 그로 인해 우리는 저도 모르게 그들의 죽음에 애도하며 그들의 얼굴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영화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역사와 사람을 만나게 하는 것이다. 더불어 음악과 풍광 사이에서 한인 디아스포라 1세대의 역사는 지체하지 않고 흘러가고 있음을 알게 만든다.

‘그들의 발자취’, 그들이 꿈꿨을 희망
image

영화의 1부 ‘그들의 발자취’는 121년 하와이 이민 역사에서 중대한 사건을 위주로 구성된다. 낯설고도 아름다운 하와이에 뿌리를 내린 그들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절망을 밟고 살아남아 현재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그들이 바로 하와이 이민자들의 역사가 되었다. 이때 영화는 이민자들의 삶을 비극적이거나 절망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이민자들의 역사를 재연하지 않고, 당시 찍은 이민자들의 사진들이나 증언을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그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음악을 통해 이민자들의 고단함을 어루만진다.

<하와이 연가>는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기록(역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그들을 그리워하며 사랑하는 마음을 잊지 않아야 함을 주장한다. 더불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그들에게 위로를 건네고, 그곳에서 죽어간 그들을 애도하는 것이 먼저임을 말한다. 이때 카메라는 사탕수수 노동자로 일했던 한인 이민자들 36명이 묻혀 있는 ‘푸우이키 묘지’로 향한다. 하와이 심포니 오케스트라 악장 이그니스 장의 바이올린 연주는 당시 한인 이민자들이 꿈꿨을 희망을 선율로 풀어낸다. 바이올린이 전하는 감동적인 선율이 따뜻한 바람이 부는 묘지를 가득 채운다.

‘할머니의 놋그릇’, 사랑을 채우다
image

두 번째 에피소드 ‘할머니의 놋그릇’은 하와이로 결혼하러 온 ‘임옥순’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고운 한복을 입고 사진 한 장을 들고 남편을 찾아온 여자는 아직은 앳된 소녀의 얼굴을 하고 있다. 열일곱 살의 옥순은 엄마의 유품인 놋그릇을 들고 그 옛날 ‘포와’라고 불렸던 하와이로 왔다. 얼굴 한번 보지 못한 남자와의 미래를 꿈꾸며, 미지의 땅에 발을 딛는다. 리처드 용재 오닐의 비올라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옥순의 마음과 엄마가 보고 싶은 애절한 소녀의 마음을 대변한다. 그리움과 외로움이 공존하는 음악과 소녀 옥순의 이야기를 담은 애니메이션은 영화를 더욱 서정적으로 물들인다.

한인 남성 노동자들이 타국에서 결혼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들은 고국으로 자신의 사진을 보냈고, 그 사진을 보고 결혼을 결심한 사진신부들이 하와이로 도착한다. 그 숫자가 무려 700여 명에 달했다. 1912년 열일곱 살이 된 임옥순 씨도 ‘사진신부’였다. 그녀는 아름답고도 낯선 땅에서 열 명의 자녀를 낳아 키웠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녀의 자녀들이 자라 아이를 낳는다. 그중 임옥순 씨의 손자 ‘게리 박’은 하와이에서 태어나 작가가 되었으며 대학교 영문과 교수가 되었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자랐던 손자는 두 번째 에피소드의 시나리오를 직접 쓰며 할머니의 인생을 어루만진다.

옥순은 자신의 삶을 후회나 연민으로 채우지 않은 사람이다. 엄마의 유품 놋쇠 그릇을 보물이라도 되는 듯 고이 간직하며 사는 고운 옥순을 보며 자란 손자는 옥순의 이야기를 글로 쓰겠다고 말한다. 옥순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손자에게 깊은 고통을 말하는 대신 희망과 행복을 전하는 이야기를 쓰란다. 이민 1세대의 삶은 녹록지 않았을지 몰라도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내내 따뜻하고 포근한 이유는 바로 여기 있다. 이민자들의 삶을 비극과 절망으로 재연하지 않고, 앞으로 살아갈 후손들, 그들이 살아갈 땅을 만드는 것, 1세대 이민자들이 꿈꿨던 것은 바로 사랑의 마음을 채우는 것이었다. 당시 하와이 이민자들의 대부분이 고국으로 독립자금을 보냈다고 한다. 빠듯한 살림에 독립자금을 보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도 그것이 뿌듯하다고 말한다.

영화의 주인공이 하와이의 성공한 유명 인사가 아니라, 영화가 이민의 역사를 추적하는 방식이 될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 있다. 달리 말해 영화는 옥순처럼 가난한 사람들, 희망을 꿈꾸며 하와이에 정착한 사람들이 거기 살았음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차별과 편견, 고단함과 절망이 있었을지언정 꿈과 희망, 사랑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와이 연가>는 내내 따뜻한 시선을 담지한다. 어려운 시절을 잘 살아냈기에, 현재 후손들이 잘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영화 속 이민자들의 얼굴이 찍힌 사진에서 사람들은 모두 웃고 있다.

‘칼라우파파의 눈물’, 음악으로 위로하다
image

<하와이 연가>는 한인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굳이 재연하려 하지 않는다. 잊힌 역사를 사진을 통해 복원하고, 우리가 알 수 없었던 이민자들의 삶을 음악으로 감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불러준다. 그리고 그들이 견뎌내야 했을 고된 시간과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를 ‘사랑’에서 찾는다. 카메라는 그들을 잊지 않겠다는 듯 이민 1세대들이 묻힌 묘지를 찾아 위로를 건넨다.

영화의 3부는 특별한 아름다움을 지닌 땅, 고립과 절망의 장소 칼라우파파를 찾는다. 1866년 하와이왕국은 몰로카이섬 일부를 한센병 환자촌으로 지정하고 환자들을 격리했다고 한다. 칼라우파파는 가파른 절벽과 깊은 바다로 둘러싸인 곳으로, 빼어난 아름다움으로 눈을 멀게 할 정도다. 하지만 그곳은 한번 발을 디디면 나올 수 없는 어둠의 공간이기도 하다. 스물두 살의 김춘석은 1904년 미지의 땅 하와이로 떠나는 이민선에 올랐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던 그는 돈을 많이 벌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9년 후 그는 고향도 하와이에도 돌아올 수 없는 배에 오른다.

김춘석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다 한센병에 걸렸다. 하와이의 소록도라고 할 수 있는 칼라우파파는 한센병 환자들의 격리 장소였으며 그곳으로 추방된 이들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었다. 영화는 외롭게 죽어 갔을 김춘석을 기린다. 그가 묻힌 묘지를 찾아 그를 위로하듯 음악을 들려준다. 그러고 보니 영화는 김춘석의 묘지뿐만 아니라 사탕수수밭에서 일했던 노동자들과 그 노동자의 아내들이 묻혀 있는 묘지를 찾는다. 잠든 영혼들의 마음을 대변하듯 ‘저 구름 흘러가는 곳’과 ‘알로하 오에’는 처연하면서도 애틋하게 묘지를 채운다.

이 지점에서 <하와이 연가> 속 음악은 단순히 인물들의 이야기를 돋보이게 만드는 배경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영화음악은 또 하나의 주인공일 정도로 중요하다. 하와이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연주가들이 들려주는 음악은 당시를 살았던 이민자들의 감정과 그 마음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민자들이 하와이에서 꿈꿨을 소망, 그들이 느꼈을 외로움과 고독, 그리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음악으로 전달하는 방법은 어떤 재현이나 증언보다 더욱 극적이고 감동적으로 전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