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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을 깊이 헤아리는 판타지
<그림자 아이>
글 _ 장성란(영화 저널리스트)
사진 제공 _ 썬더필름
2026-07-13
유은정 감독의 두 번째 장편 <그림자 아이>는 깜깜한 화면 위로 “우리가 사는 땅 아래” 있는 “다른 세계”에 대해 말하며 시작한다. 땅 아래 세계에 있는 그림자의 모습이 크레파스로 그린 듯한 애니메이션으로 나타나다가, 카메라가 위로 움직이며 땅 위로 올라온다. 화면은 실사로 바뀌고, 이수련(유나)과 수안(박소이) 자매가 그림책을 보고 있다. 계속 이어지는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는, 수련이 소리 내 읽고 있는 그림책의 내용이다. 그림자는 땅 위에서 노는 똑 닮은 두 아이에게 몸을 하나 달라고 한다. 그러지 않으면 둘 중 하나를 땅 아래로 영원히 데려가겠다고 으른다. 두 아이가 다시 만나려면, 한 아이가 그림자에게 몸을 주면서 ‘검은 문’을 향해 두려움 없이 뛰어내려야 한다. 영화는 이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한국영화에 드문, 판타지적 상상력
처음부터 판타지 요소를 담담히 드러내는 건 유은정 감독 영화의 특색이다. 첫 장편 <밤의 문이 열린다>(2019)도 그렇다. 추석날의 풍경에 이어, 사체를 비추는 화면 위로 내레이션이 흐른다. “유령은 사라지지 않기 위해 어제로 걷는단다.” 이것이 앞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판타지적 요소가 인물들이 살아가는 현실 세계에 이상야릇한 틈을 벌리고, 그 속에서 인물 각자 어떤 선택을 하는지 지켜본다. 한국영화에 드문, 판타지적 상상력이다.
<그림자 아이>에서는 앞서 설명한 첫 장면으로부터 3년 뒤, 수안이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언니를 찾는다. 수련은 3년 전 그날 밤 자살했다. 엄마 박금옥(임수정)은 수련이 죽었다는 사실을 어렵사리 수안에게 알린다. 얼마 뒤 수안은 언니와 똑같이 생긴, 열세 살 동갑내기 김재인(유나)을 만난다. 그의 등장은, 금옥과 수안 모녀에게 각기 다른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아니, 강화한다. 수안은 언니가 그립고, 금옥은 수안마저 잃을까 두렵다. 재인은 수련을 되찾아 줄 존재일까, 수안을 위험하게 할 존재일까. 영화는 그 기대와 의심 사이에서 궁금증을 피운다. 그게 중반까지 미스터리의 긴장을 높인다.
각기 다른 사연과 욕망을 지닌 세 여성이 기묘한 사건으로 얽히는 구조. <밤의 문이 열린다>에 이어 <그림자 아이>도 그렇게 흐른다. 두 영화 모두 세 주인공이 맺는 관계가 각기 다르다. 서로 돕기도 하고, 미안함을 느끼는가 하면,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를 이루기도 한다. 그 차이에서 오는 역동성이 이야기를 끌고 간다. 여성 캐릭터를 결코 일률적으로 다루지 않고, 각자 자기만의 문제와 이야기를 지닌 복합적 존재로 그리는 점이 돋보인다. <그림자 아이>는 중반부에 이르러 ‘그림자와 두 아이’ 이야기의 내막을 드러내며, 재인과 수안, 재인과 금옥의 관계는 보다 극명히 엇갈린다. 유은정 감독은 이로써 이야기 한복판에 판타지와 스릴러를 전작에 비해 더 깊이 새긴다.
‘그림자와 두 아이’ 이야기는 그냥 동화가 아니다. 저주다. 두 아이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는 저주. 거기서는 죽어야 할 아이가 정해져 있다. 재인은 과연 ‘저주의 아이’일까. 그 저주를 거부하면 어떻게 될까. 그 갈등 앞에서 영화는 재인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차차 벗겨 보인다. 그럴수록 그가 혼자라는 사실이 뚜렷해진다. 그에게는 금옥 같은 부모도, 수련 같은 언니도 없다. 홀린 듯한 얼굴로 다가와 원래 알던 사이 같다고 말하는 수안이 어쩌면 아주 오랜만에 생긴 친구인지 모른다. 재인에게 삶은, 십 대를 빨리 벗어나고 싶은, 그래서 모든 걸 알아서 결정하게 되기를 기다릴 만큼 고되고 외로운 것이다.
혼자가 될 것인가, 함께할 것인가
유은정 감독은 ‘혼자’라는 주제를 줄기차게 파고든다. <밤의 문이 열린다>의 강혜정(한해인)은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혼자 살아가려 한다. 연애나 결혼에도 관심 없다. 그는 유령이 되면서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진짜 혼자가 된다. 빈집에서 노는 꼬마 전수양(감소현)도 혼자고, 유효연(전소니)은 언니(이자민)가 있지만 빚에 쫓기는 처지에서 벗어나게 도와줄 이가 없다. 이들이 기묘하게 얽히며 극의 세 꼭짓점을 이룬다. 혼자가 되는 것을 자처했던 혜정은 유령이 되어 시간을 거꾸로 밟으며,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는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
<그림자 아이>는 ‘그림자와 두 아이’의 저주 자체가 주인공들에게 혼자가 되는 선택을 강요한다. 똑 닮은 두 아이가 함께 놀도록 놔두지 않는 그림자. 아이는 혼자가 되어야만 한다. 저주에 따라 한 아이를 희생시킬 것이냐, 저주를 거부할 것이냐. 영화는 이를 상실의 문제와 연결한다. 금옥은 상담사다. 몇 년째 자살 유가족 모임을 열고 있다. 이제는 그 모임에서 자기 얘기를 하며, 수련을 잃은 상처를 돌보려 한다. 그 마음이 저주 앞에서 흔들린다. 유은정 감독은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을 때 그 상실을 안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란 질문에서 이 영화를 쓰고 연출했다. 그렇게 볼 때 땅 아래 세계는 사후 세계를 상징한다.
금옥은 저주를 통해 수련을 잃은 이유와, 수안을 잃지 않을 방법을 찾고자 한다. 수안은 다르다. 누군가의 죽음을 다른 이가 대신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없어져야 할 아이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믿음에 이르기까지, 자살 유가족 모임에서 자살로 아빠를 잃은 윤서(전채은)를 만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된다. “언니 아빠랑 똑같이 생긴 사람을 만나면 어떨 것 같아요?”라고 수안이 묻자 윤서는 이렇게 답한다. “그 사람이 아빠 몫까지 행복하길 바랄 것 같은데.” 그 뒤 수안은 재인에게 이런 마음을 전한다. “네가 어떤 얼굴을 해도 너는 그냥 김재인이야.” 그러고 보면 재인은 영화 내내 자신이 누구를 닮은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임을 말하고 있다. 그 마음을 합쳐 수안과 재인은 저주를 거부하고 ‘그림자와 두 아이’ 이야기를 자기들 식으로 끝맺는다.
그를 통해 유은정 감독은 어떤 태도로 상실을 대하는 것이 좋을지 이야기한다. “내가 대신 죽어도 좋다고 생각할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이었다고 해도 나를 위한 존재가 아니었음을 받아들이는 것. 그의 인생은 내가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온전했음을 인정하는 것” 말이다. 금옥과 그의 아버지 희권(박윤희)이 “부모가 해야 할 일”을 내세우며 저주를 따르는 것과 달리, 두 아이가 저주에 얽매이지 않고 서로를 구하는 결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림자 아이>는 <밤의 문이 열린다>에 비해 판타지 요소를 한층 강화하면서도, 그것을 볼거리로 화려하게 벌리지 않는 연출을 이어간다. 그림책에서 이어지는 듯한 애니메이션과 현실 배경을 해치지 않는 특수효과로 땅 아래 세계와 그림자를 표현한다. 수련이 금옥을 찾아오는 장면 역시, 과거 장면인 듯 꿈인 듯 환영인 듯 은근슬쩍 묘사한다. 현실과 판타지를 넘나드는 방식이 전작보다 훨씬 부드럽다.

조화롭게 맞물리는 연기 세 주연의 연기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박소이는 언니와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각별한 자매애를 바탕으로, 수안이 거치는 감정의 변화를 힘 있게 그려 나간다. 재인에게서 언니를 보고, 점차 그가 언니를 대신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모든 과정에 수련에 대한 그리움이 뭉클하게 녹아 있다. 그 촉촉한 정서가 드라마의 한 축을 이룬다. 유나는 극 초반 수련의 모습부터 재인까지 1인 3역을 소화한다. 동생을 위하는 수련과 보다 명랑하고 호기심 많은 재인을 다르게 연기하면서도, 그 차이를 강조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그 둘을 자연스럽게 오가는 속에, 재인이 지닌 외로움과 그늘을 서서히 복합적으로 드러낸다. 그게 재인을 불우한 청소년의 전형에 가두지 않고, 그 누구도 아닌 재인 자신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그에 더해, 재인이 또다시 누군가의 얼굴로 변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얼굴의 배우가 그 모습을 연기하는 대신, 그 역시 유나 배우가 소화하고 얼굴에 컴퓨터 그래픽을 입혔다. 기술적으로 훨씬 까다로운 작업이지만, 유은정 감독은 “유나 배우가 쌓아 올린 재인의 역사를 이어가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설명했다.

임수정 역시 금옥의 감정 변화를 물 흐르듯 보여준다. 수안을 세심히 살피고 자살 유가족의 슬픔을 차분히 위로하는 모습에서, ‘그림자와 두 아이’ 이야기의 내막을 알고 나서 재인을 달리 대하는 모습까지. 굉장히 극적인 변화를 어디 하나 과하게 힘주는 법 없이 자연스럽게 그려 보인다. 박소이, 유나, 임수정 세 배우의 연기가 유 감독 특유의 현실적인 판타지 안에 조화롭게 맞물린다. 특히 결말에서 금옥이 십 대의 두 소녀와 긴장 관계에 놓인다는 점에서, 임수정이 출연했던 미스터리 공포 <장화, 홍련>(2003)을 떠올리게 하는 점이 흥미롭다. 조선시대 소설 <장화홍련전>을 모티브로 한 <장화, 홍련>에서 임수정은 새엄마 은주(염정아)의 학대에 맞서 동생 수연(문근영)을 보호하려 신경을 곤두세우는 수미로 열연했다. 그로부터 23년 뒤 그가 <그림자 아이>에서, 유사 자매라고도 할 수 있는 두 십 대 소녀와 대립각을 세우는 젊은 엄마 역을 했다는 것이 그저 우연으로만 느껴지지 않는다. 임수정은 이 영화의 프로듀서로도 활약했다.
한국영화에 귀한 판타지적 상상력을 꾸준히 밀고 나가는 감독의 두 번째 장편, 그것도 여성 감독이 풀어내는 여성 캐릭터의 다채로움이 돋보이는 미스터리다. 유은정 감독만의 영화 세계가 그 문을 향해 앞으로도 더욱 두려움 없이 뛰어들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