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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장편 애니메이션이 받은 반가운 편지
<연의 편지>
글 _ 허남웅(영화평론가)
사진 제공 _ 롯데엔터테인먼트
2025-10-01
올해는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에 있어 기념비적인 한 해라 할 만하다. <퇴마록>(2월 21일 개봉)이 50만 명 이상의 관객 수로 의미 있는 스코어를 기록했다. 한지원 감독의 <이 별에 필요한>(5월 30일 공개)은 넷플릭스가 처음으로 제작과 투자를 한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김용환 감독의 <연의 편지>(10월 1일)가 도착했다.
잊힌 가치의 복원
소리(이수현)가 편지를 받은 건, 아니 발견한 건 학교 책상 서랍 안이었다. ‘1’이라고 적힌 봉투는 곧 편지가 더 이어질 것임을 예고한다. 아니나 달라, 다음 편지가 숨겨져 있는 장소에 관한 힌트가 편지 말미에 적혀 있다. ‘내 편지를 읽고 싶다면 두 번째 편지를 찾아줘.’ 소리는 다음 편지를 찾을 생각에 기대가 부풀어 오른다. 피하고 싶었던 학교생활이 별안간 흥미로워진다. 호연(민승우)이라고 이름을 밝힌 편지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너무 궁금하다.
소리에게는 호연의 편지가 학교에 다니는 유일한 낙이다. 소리는 학교에 나오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이전 학교에서 왕따 당하는 친구 일에 나섰다가 함께 따돌림을 당한 뼈아픈 경험이 있어서다. 서울에서 할머니가 있는 춘천의 학교로 전학 오면서 새 출발을 다짐했지만, 새로운 친구를 사귄다는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행여 다시 해코지를 당하는 건 아닐까 두려움이 엄습해서다.
<연의 편지>는 네이버 웹툰의 여름 특선으로 소개된 10부작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한다. 1화부터 10점 만점에 가까운 독자의 평점을 받으며 최종화까지 기복 없는 관심을 받았다.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의 관계가 문명의 이기라 할 수 있는 각종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포섭된 요즘, 손으로 글을 쓰고 편지지를 봉투에 넣어 직접 다른 이에게 전달하는 ‘편지’의 가치를 복원해서다.
안 그래도 김용환 감독은 “편지로 이어지는 이야기에 중점을 뒀다”면서 “편지를 찾아가는 재미, 편지의 주인을 추측하면서 쌓이는 기대감과 호기심과 감동과 같은 종류의 감정에 임팩트를 주려 노력했다”고 연출의 주안점을 밝혔다. 서로를 잇는다는 개념을 편지라는 매개를 통해 구체화한 것이다. 그래서 <연의 편지>는 서사의 동력이 되는 소리와 호연의 관계에만 포커스를 맞추지 않는다.
학교 폭력은 다수가 소수를 힘으로 억압하는 것을 넘어 관계를 파탄 내는 것으로써 이는 공동체의 파괴를 의미한다. 소리가 춘천으로 전학을 와야만 했던 이유, 소리의 새출발은 정글과 다름없는 서울의 학교를 떠나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잃었던 친구의 가치를 되찾는 것에 있다. 그에 따라 소리는 호연의 다음 편지를 찾아 학교 여기저기 발품을 하고 그 과정에서 여러 친구를 사귀게 된다.
공간으로 이어지는 가치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접한다는 뜻을 지닌다. 호연이 보낸 편지가 각기 다른 장소에 숨겨져 있고 소리가 이를 찾을 때마다 다양한 인물을 만나거나 도움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실 서랍에서 발견한 첫 번째 편지에 적혀 있는 힌트 ‘819.93 학99’를 보자 책 넘버임을 직감한 소리는 도서관으로 향하고 거기서 두 번째 편지를 손에 넣는다.
편지에 적힌 내용의 일부가 흥미롭다. 마치 사전식으로 구성한 듯 기숙사 사감과 급식 조리원, 경비 기사님 등의 이름과 경비 기사님이 기르는 고양이의 모습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도서관이라는 공간의 정체성에 맞춰 편지의 구성까지 섬세하게 신경 쓴 연출은 웹툰 원작이 왜 애니메이션으로 적합했는지를 증명하는 주요한 이유 중 하나다.
김용환 감독도 강조하기를 “모든 편지의 장소를 설계하고 연출하는 과정은 상당한 작업량을 요구했다. 각 공간의 개별적인 퀄리티를 유지하면서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게 <연의 편지>는 학교가 주요 공간이되 그 안에 교실과 도서관은 물론, 학교 옥상과 양궁장, 토끼장과 화원까지 열 군데가 넘는 개별의 시설을 담아낸 까닭이다.
이곳 학교의 시설들은 소리가 아픔을 겪었던 서울 도심의 위압적인 빌딩과 다르게 자연의 품에 안기어 원을 그린 듯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사이좋게 모여 있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격의 없이 서로 ‘주고받는’ 편지처럼. 소리는 학교 곳곳이 생소한 장소라고 해도 열린 공간의 형태인 까닭에 스스럼없이 발을 들일 뿐 아니라 그곳에서 만나는 누구와도 격의 없이 관계를 발전시켜 나간다.
호연의 편지를 찾으며 새로 사귀게 된 동순(김민주)이 그런 경우다. 호연이 편지에서 알려준 대로 학교 담벼락 개구멍으로 중국집에 음식을 시켜 받은 후 올라간 학교 옥상에서 동순 또한 중국 음식을 먹고 있다. 처음 맞닥뜨린 사이지만, 같은 음식을 시켜 먹은 것이 인연이 되어 만난 동순도 소리처럼 호연의 존재가 궁금하다. 소리와 다르게 동순은 호연과 학교에서 함께 지냈는데 기별도 없이 안녕을 고하고 떠난 까닭에 혼자가 된 느낌이다.
동순은 호연이 소리에게만 편지를 남긴 게 속상하지만, 호연이 호의를 갖는 친구라면 자기에게도 친구라는 생각에 소리를 받아들인다. 한때 호연은 병에 반딧불이를 담아 숲속에 있던 동순을 찾은 적이 있다. 그때 호연은 이런 얘기를 했다. “모든 장소는 들어가기 위한 방법이 달라. 사람도 마찬가지고. 관심을 가지고 인지하는 순간 내 앞에 존재하게 되는 거야.”
옥상이란 공간은 건물의 꼭대기여서 고립된 느낌이 강하다. 호연의 편지로 연을 맺은 소리와 동순은 이제 혼자가 아니다. 더는 옥상에서 친구들을 피해 있을 필요가 없다. 동순은 소리를 따라 옥상에서 내려오고 소리는 학교를 잘 아는 동순을 따라 호연의 편지가 숨겨진 장소를 찾아 나선다.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고 보니 소리와 동순은 호연의 말처럼 호연이 눈앞에 있는 듯하다.
여전한 2D의 가치
원작자 조현아 작가는 <연의 편지>에서 소리가 호연의 첫 번째 편지를 발견하고 읽어 내려가는 장면의 연출을 두고 “만화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부분을 그대로 녹였다”며 원작의 영상화에 만족감을 표했다. 아직 정체를 알지 못해 실루엣으로 묘사된 호연과 소리가 교차하며 다른 공간에 있는 두 사람이 편지로 연결되는 장면이 원작의 컷을 살아 있는 이미지로 구현했다는 것이다.
김용환 감독은 각본가 정은경과 원작을 각색하면서 “원작이 전하는 이야기의 울림과 감동에는 분명한 힘이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움직이는 이미지로 원작의 감동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것이 이번 각색 작업의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감독은 덧붙이기를, “인물들의 선한 행동에서 오는 울림과 진심이 담긴 편지에서 오는 힘을 애니메이션으로 확장하는 게 목표였다”고 전한다.
편지로 대변되는 <연의 편지>의 감성은 확실히 아날로그적인 데가 있다. 원작자 조현아는 어느 정도 학교생활에 익숙해진 소리가 친구들과 등나무 밑에서 각자 가지고 온 도시락을 나눠 먹고 동순의 양궁 경기를 함께 관람하며 우정을 쌓는 과정에 대해서도 애정을 드러냈다. “단편인 원작에서 수경, 호란, 송희 세 친구의 비중이 아쉬웠는데 애니메이션을 통해 좋은 방향으로 구현되어 감사하다.”
편지가 주는 감성에 더해 우정의 가치까지, SNS와 ‘나 혼자’ 문화가 보편화된 지금에 <연의 편지>가 전하는 가치는 과거의 좋았던 때를 현재 시점으로 대리만족하게 하는 ‘낭만’으로 다가온다. 원작의 그림이 주는 정서가 그러한데 굵고 둥근 펜의 터치가 느껴지는 선(線) 하며, 수묵화처럼 번지듯 채워진 색감이며, 여유로움을 제공하는 컷의 하얀 여백까지, 이 작품은 2D에 최적화된 인상이다.
김용환 감독도 원작 웹툰을 애니메이션으로 옮기며 2D의 작업 방식을 고수했다. “한국적인 아날로그 감성과 정서를 자연스럽게 녹이고 아름답게 표현하는 데 공을 들였다.” 웹툰의 애니메이션을 위한 기획 개발부터 프로덕션까지 약 5년 반의 시간과 제작사, 공동 제작사를 포함해 실력 있는 외부 아티스트의 영입과 여러 스튜디오의 제작 협력까지, 이 또한 예술로 연결되는 ‘함께’의 가치라 할 만하다.
한국 애니의 밝은 미래
과연 소리는 지옥 같은 학교생활을 천국으로 이끈 호연과 만날 수 있을 것인가. 동순은 작별 인사 없이 떠난 호연과 재회하여 화해할 것인가. 이런 의문들을 사연 전개의 추진력으로 삼아 극의 몰입감을 높이는 <연의 편지>의 또 다른 주제는 ‘용기’다. 감독의 표현에 따르면, “소리의 잃어버린 용기를 찾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편지를 통해 용기를 내고 성장하는 주인공의 사연은 상황은 달라도 누구나 해봤을 고민이다.”
그렇다. 상대의 반응이 어떤지 모르면서 편지를 보내는 호연의 용기는 더 나은 미래를 갈망하기에 나온 선의의 감정이고 행동이다. 소리 또한 서울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친구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용기를 내어 가해 학생과 맞선 적이 있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건 용기를 내고 이를 행동으로 옮길 때 바로 거기서부터 변화가 시작된다는 걸 인지하는 거다.
이 기사의 첫 문단에 언급한 <퇴마록> <이 별에 필요한> 외에도 <연의 편지> 개봉 일주일 후 <나쁜 계집애: 달려라 하니>(10월 7일)가 극장 관객과 만날 예정이고 극영화로 필모그래피를 쌓아 온 봉준호 감독과 김태용(<만추> <가족의 탄생> 등) 감독은 각각 <더 밸리>와 <꼭두> 애니메이션을 작업 중이다. <퇴마록>도 속편 제작이 공식적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을 극장에서 보는 게 이벤트 같았던 과거를 생각하면 엄청난 변화다. <연의 편지>가 장편 애니메이션 데뷔작인 김용환 감독은 단편 <Returning home in glory>(2016)가 멜버른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의 경쟁 부문에 초청받으면서 주목받았고 이후 웹 애니메이션 <연애하루전>(2018), <신의 탑>(2020) 등에서 연출과 프로듀서로 참여하며 실력을 쌓아 왔다. <연의 편지>로 지난해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장편 심사위원상을 받으며 “한국 애니메이션 업계에 유망한 신예 감독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와 같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올해 우리가 목격하는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의 릴레이 개봉은 김용환 감독과 같은 신예들이 열악한 환경에 실망하지 않고 용기 내어 작품을 만든 결과다. 드디어 주류 시장에서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의 본격적인 출발을 알린다는 점에서 굉장히 반가운 편지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