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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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 볼수록 짙어지는
<얼굴> 박정민 배우
글 _ 정시우(영화 저널리스트)
2025-10-01
좋은 배우의 얼굴에는 시간과 함께 깊어진 입체감이 있다. 박정민의 얼굴이 그러하다. 불안했던 청춘 베키(<파수꾼>(2011))부터 과정이 아름다웠던 사람 송몽규(<동주>(2016)), 서번트증후군을 앓는 천재 피아니스트 진태(<그것만이 내 세상>(2018)), 트랜스젠더 유이(<다만 악에서 구하소서>(2020)), 순박함과 야망 사이를 오간 장도리(<밀수>(2023)) 등 그의 얼굴 위에서 살고 간 캐릭터들이 유화처럼 차곡차곡 덧그려지고 쌓여서 그 얼굴에 깊이를 새겼다. 유일무이한 박정민만의 질감으로. 영화 <염력>(2018), 넷플릭스 <지옥>(2024)에 이어 연상호 감독과 세 번째로 호흡을 맞춘 <얼굴>에서도 박정민은 그만의 색을 캐릭터에 덧입혔다. 그조차 처음 봤다는 ‘얼굴’을.
연상호 감독과 박정민의 세 번째 만남이 된 영화 <얼굴>
(제공=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배움과 가능성을 얻은 현장
영화 <얼굴>은 시각장애인 임영규(권해효, 박정민)와 그의 아들 임동환(박정민)이 40년 전에 실종된 아내이자 어머니인 정영희(신현빈)의 백골 사체를 마주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연상호 감독이 2018년에 내놓은 동명 그래픽노블이 원작이다. 박정민은 이번 작품에서 시각장애의 한계를 딛고 도장을 파며 성실히 살아가는 젊은 임영규와 타살 가능성이 있는 어머니의 죽음을 파헤치는 아들 임동환으로 분해 1인 2역에 도전했다. “제가 <돼지의 왕>(2011), <사이비>(2013) 등 연상호 감독님 애니메이션을 굉장히 좋아해요. <염력> 무대 인사 도중에 <얼굴> 책을 주셨어요. 집에 가서 읽는데, 감독님 만화 특유의 그로테스크하게 일그러진 표현과 메시지가 여과 없이 들어가 있어서 좋더라고요. 원작을 알고 있었으니까, 캐스팅 제안이 왔을 때 대본을 보지 않고 바로 출연하겠다고 했죠.”
<얼굴>은 최근 한국영화에서는 보기 힘든 형태로 제작된 작품이다. 2억 원의 제작비, 12.5회 차의 촬영, 20여 명의 소수 정예 스태프로 완성되었다. 스태프들이 최저시급만 받고, 나머지는 수익 배당금으로 대체한 결과다. 박정민은 아예 출연료를 포기하고 러닝 개런티(흥행 성적에 따라 배우에게 출연료를 더 지급하는 제도)만 받는다. 그러니까 정형화된 상업영화 제작 방식의 틀에서 벗어나보려는 연상호 감독의 취지에 뜻이 모이지 않았다면 실현 불가능했을 프로젝트인 셈이다.
박정민은 젊은 시각장애인 임영규와 그의 아들 임동환까지
1인 2역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제공=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그러나 박정민은 이 영화에 출연한 이유가 “제작 환경에 대한 도전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이건 연상호 감독님이 진짜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이 가장 컸어요. 감독님과 이 작품을 만들면 배울 수 있는 게 많을 것 같았고요. 그리고 자유롭게 열어주시는 감독님이기에 연기적으로도 여러 도전을 해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박정민은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연기에 대한 여러 가능성을 봤다. “과거 장면을 찍을 때 ‘어? 이 표정은 만화적이네!’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저조차 본 적 없는 의도치 않는 표정이 나왔는데, 그건 제가 신나서 연기했다는 증명인 셈이죠. 배우로서 주도적으로 제 캐릭터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재밌었습니다.”
제작비 여건상 짧은 시간 안에 촬영을 마쳐야 하는 상황은 박정민이 새로운 마음으로 작품에 임하는 계기가 되었다. “보통의 영화는 하루에 평균 2분 분량 정도를 찍어요. 그런데 <얼굴>은 촬영 회차가 적다 보니 하루에 8~9분 분량을 찍어야 했어요. 웬만하면 두 테이크 안에 끝내야 했기에, 촬영 나갈 때부터 집중도가 확 올라가더군요. 연상호 감독님과 세 번째 작품인데 이번처럼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눈 것도 처음이었어요. 현장에서 실수하지 않기 위해 회의도 하면서 찍었죠.”
<얼굴>은 사진 한 장 남지 않은 어머니 영희의 생전 행적을 인터뷰와 르포 형식으로 추적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방점은 그녀가 ‘어떻게’ 죽었느냐가 아니라 ‘왜’ 죽었는가에 찍혀 있다. 스펙터클보다 질문의 힘으로 밀고 나가는 작품이란 의미다. 동환을 만난 어머니의 옛 지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모아 “영희는 못생겼다”고 증언하는데, 이를 통해 영화는 ‘외모 낙인’에 대한 사회적 문제를 곱씹게 한다. 특히 결말에서야 공개되는 영희의 얼굴은 관객들에게 묵직한 메시지와 여운을 남긴다. “(임동환이 사진으로 어머니 얼굴을 확인하는) 마지막 장면을 찍으면서 어떠한 편견이나 불편한 정의를 마주할 용기가 없는 사회 때문에 한 사람이 무너져 내렸다는 사실이 비참하게 다가왔어요. 동환의 눈물이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눈물이 아버지 임영규의 눈물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1인 2역이라 더 그렇게 다가온 것 같아요.”
<얼굴>을 통해 본인도 몰랐던 자신의 표정과 연기를 발견한 박정민
(제공=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뒤틀린 내면을 표현하다
박정민은 앞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 캐릭터를 연기하기 위해 익숙하지 않은 백탁 특수 렌즈를 착용하고 가발 분장까지 하며 열연했다. 나라에서 공인한 전각 장인을 찾아가 사흘 동안 도장 파는 법도 배웠다. “도장 파는 걸 보고 있으니 경이롭더라고요. 요즘은 거의 기계가 도장을 파잖아요? ‘사람이 파는 경이로움은 따라올 수 없구나’ 생각했죠. 어설프긴 하지만 동료들에게 제가 판 도장을 선물해주기도 했습니다.”
박정민은 여러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시각장애인임을 밝힌 바 있다. 그것이 이번 캐릭터를 준비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까. “기본적으로 시각장애인 분들이 지팡이를 쓰는 방식이나 움직임, 걷는 속도 등을 영상을 통해서 익혔어요. 그리고 평소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들을 연기에 활용하기도 했고요. 다만, ‘시각장애인 연기를 엄청 잘해야지’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외적인 모습보다 인물의 뒤틀린 내면과 감정을 표현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박정민이 특히 중점을 둔 건 임영규의 수치스러운 마음들이었다. “그 시대에는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더 심했을 겁니다. 자기 안의 욕망은 들끓어 가지만, 살아남기 위해 모멸감을 느끼면서도 웃어야 했겠죠. 웃음을 많이 이용해서 그런 충돌 지점을 표현하려고 했어요.”
<얼굴>은 개봉 첫날 3만 5천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빠르게 손익분기점을 돌파했다. 경쟁작인 애니메이션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을 제치고 박스오피스 1위에도 올랐다.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을 이길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어요. 박정민이 탄지로를 이겼다고 웃으며 말하는 분들도 있더군요.(웃음)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다른 영화를 신경 쓸 게 아니라 저희 영화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파이를 꾸준히 갖고 가는 게 중요하다고요. 해석하는 재미가 있는 영화니까, 오셔서 이런저런 분석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박정민은 시각장애인 임영규의 외적인 모습보다 뒤틀린 내면에 집중했다
(제공=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작은 목소리들을 위한 스피커
걸음이 빠르다. 2025년을 안식년으로 선언한 박정민이지만, 연기만 쉬어 갈 뿐 출판사 ‘무제(無題)’의 대표로서 더 바쁜 한 해를 보내고 있다. 무제는 박정민이 2020년 만든 출판사로, 지난여름 내놓은 김금희 작가의 <첫 여름, 완주>로 새로운 시도를 하기도 했다. 종이책보다 시각장애인용 오디오북을 먼저 공개, 국립장애인도서관 및 전국 장애인 도서관에 무료로 배포한 것이다. “세상에 나와야만 하는 책 혹은 들여다봐야 할 가치가 있는 이야기라면 책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조금 더 구석구석 들여다보고 끄집어낼 수 있는 걸 끄집어내어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요. 제가 다른 출판사 대표보다 인지도가 높고 유명하다면 스피커가 남들보다 더 크다는 뜻일 거예요. 누군가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스피커가 되는 거라면 기왕이면 조금 더 작은 목소리의 스피커가 되는 게 옳지 않을까 싶어요. 최대한, 착한 회사가 되고 싶어요.”
역설적으로 투잡 생활은 그의 본업에 신선한 자극을 주기도 했다. “출판사를 하면서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게 되었어요. 출판 시장이 작기 때문에 정말이지, 한 명의 독자가 만들어내는 파급력이 엄청나거든요. 또 하나는 연기를 내가 정말로 좋아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 촬영장이 가장 좋구나’, ‘내가 편했구나’를 알게 된 거죠. 왜냐하면 배우는 연기만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출판사를 통해 회사 생활을 하다 보니 신경 쓸 게 너무 많더라고요. 많은 사람과 소통하고, 사과하고, 싸우는 과정이 너무 번잡해서 역지사지의 마음이 생기게 되었죠.”
배우, 출판사 대표 외에 박정민이 지닌 또 하나의 정체성은 ‘글 쓰는 사람’이다. 2016년 발표한 에세이 <쓸 만한 인간>을 통해 ‘쓰는 배우’로도 사랑받고 있기 때문. 그러나 정작 박정민은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은 없다”고 몸을 낮췄다. “출판사를 차리고 난 후, 내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책을 만들며 좋은 글들을 많이 보다 보니, 제 이전 글이 너무 형편없게 느껴지더라고요. 정제된 생각을 정제된 솜씨로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나중에 가서 후회할 것 같더라고요. 만약 다시 글을 쓰더라도 허구의 이야길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그의 이 발언을 <쓸 만한 인간>을 사랑한 독자들은 서운해하지 않을까. “그럴 수 있는데 어쩔 수 없어요. 심지어 <쓸 만한 인간>을 절판시켰습니다. 이제 팔지 않아요. 그런데 많은 작가님이 자신의 첫 책을 보통 절판시킨다고 하더라고요. 부끄러워서. 저도 그런 마음이었어요.”
출판사 무제 대표로서 박정민은 책 소개는 물론, 북토크, 아티스트 인터뷰,
책 관련 행사 후기 등을 무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을 통해 들려주고 있다
(제공=출판사 무제 유튜브 채널 캡처)
쓸 만한 인간이 되기 위해
1년여의 연기 공백기를 가진 박정민은 오는 12월 2일 개막하는 라이브 온 스테이지 공연 <라이프 오브 파이>로 다시 연기 활동에 나선다. 그가 공연 무대에 서는 건 2017년 <로미오와 줄리엣> 이후 8년 만이다. “사실 무대에 서고 싶지 않았어요. 너무 무서웠거든요. 거절하려고 했는데 유튜브로 <라이프 오브 파이> 공연 실황을 보고 멋있어서 도전하고 싶었어요. 같이 하는 박강현 배우가 베테랑인 만큼 배울 것도 많겠다고 생각했고요. 또 (같은 소속사) (황)정민이 형도 무작정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내가 안 하면 자기가 하겠다면서.(웃음) 너무 좋은 작품인데 후배가 안 한다고 하니까 안타까워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 같아요.”
<쓸 만한 인간>은 절판시켰지만, ‘쓸 만한 인간’이 되기 위한 그의 고군분투는 진행 중이다. 최근 박정민은 JTBC <뉴스룸>에 출연해 “항상 올바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생각이에요. 제가 그런 사람이 아니어서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실수도 하고, 잘못도 하고, (타인에게) 상처도 주는데, 그럴수록 나는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커져요. 감정 표현을 덜 하려다 보니 힘든 점이 있죠. 물론 복에 겨운 소리라는 걸 알아요. 그래서 즐겁게 살려고 노력 중입니다.”
(제공=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