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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오컬트의 가능성을 촉진하는 잠재력
<퇴마록>
- 글
- 민용준(영화 저널리스트)
- 사진
- (주)쇼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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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과 혼란과 격변과 불안. 1990년대 한국 사회를 돌아보면 떠오르는 단어들. 군사정권 시대를 청산하는 문민정부가 들어서는 동시에 기성세대에 의해 X세대라 규정된 신세대가 새로운 담론을 이끄는 주류로 부상했다. 개인PC 보급이 활발해지며 사이버 스페이스라 지칭했던 온라인 네트워크에 대한 개념이 본격적으로 일상에 틈입했고, ‘www’로 함축된 월드와이드 웹과 함께 본격적인 인터넷의 시대가 열렸다. 이처럼 사회적 역동성이 강해지는 상황에서 IMF 사태로 일컬어지는 외환위기가 발발하며 사회 전체가 휘청거리는 가운데, 세기말에 다다라 노스트라다무스의 지구멸망설이 퍼지고, 새천년과 함께 전산망이 마비되는 Y2K 혹은 ‘밀레니엄 버그’라는 대재앙이 일어날 것이라는 불안한 소식이 신문을 도배하기도 했다.
그리고 일찍이 <퇴마록>이 있었다. PC 통신 서비스 ‘하이텔’의 공포/SF 게시판에 연재를 시작한 뒤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끝내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누적부수 100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다는 이우혁 작가의 <퇴마록>은 전설이다. 오늘날 웹소설 성공 시대의 원형 같은 스토리다. 1990년대에 태동한 사이버 스페이스 인프라를 바탕으로 커뮤니티가 형성되었고, <퇴마록>은 그 안에서 성장한 이야기꾼이 출판 시장의 주류 작가로 등극하는 새로운 사례였다. 그리고 오컬트라는 단어 자체가 대체로 생소했던 1990년대의 한국 대중에게 찾아온 첫 번째 K-오컬트의 원형과도 같다. 세기말로 접어드는 불길한 시대 정서에 부합하는 동시에 지극히 한국적인 하이브리드 장르의 규격을 일찍이 제시한 사례다.
오컬트를 한국영화의 주류 장르로 둔갑시킨 천만 영화 <파묘>를 본 관객 중 일부가 <퇴마록>을 떠올렸다는 반응이 나온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각기 다른 능력을 갖고 제각각의 역할을 수행하는 네 사람이 한 팀을 이루어 악귀를 퇴치하는 내러티브 자체가 <퇴마록>을 떠올리게 만든다. 출신도, 나이도 각기 다른 네 명의 퇴마사를 주축으로 펼쳐진 <퇴마록>의 세계관은 국내편, 세계편, 혼세편, 말세편, 그리고 외전까지 무수히 확장되었다. 그야말로 오늘날 일컫는 ‘슈퍼 IP’ 중의 슈퍼 IP였다. 그러니까 올 것이 왔다. K-오컬트라는 키워드가 새롭게 부상한 한국영화 신에서 <퇴마록>이라는 제목이 다시 언급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원작 소설의 포문을 여는 국내편의 첫 번째 챕터 ‘하늘이 불타던 날’을 바탕에 둔 애니메이션 <퇴마록>은 일종의 프롤로그 기획에 가깝다. 이적을 행했다는 이유로 교단에서 파문당한 박 신부는 은밀하게 역사를 이어온 해동밀교의 일에 관여하게 된다. 살생을 마다하지 않고 악신의 힘을 빌려 세상을 어지럽히려는 해동밀교의 145대 교주를 저지하려는 내부자들의 편에 서게 된 박 신부는 주술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해동밀교 수련자이자 교주의 양자 준후를 위험에서 구한다. 그 과정에서 태극기공을 연마했으나 오른팔로만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청년 현암이 박 신부와 협력한다. 그 이전에 저승의 애염명왕이 몸에 봉인된 승희는 박 신부의 구마 의식을 우연히 목격하고 조력하며 짧지만 강한 존재감을 피력한다.
1990년대에 발표된 원작 소설은 작품의 동시간대나 다름없는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사이를 시제 배경으로 다룬다. 2025년에 찾아온 애니메이션 <퇴마록>도 마찬가지다. 스마트폰은 물론 휴대전화 자체가 부재했던 원작 소설의 시대와 달리 애니메이션의 인물들은 스마트폰 사용이 익숙해 보인다. 자연스럽게 현대적인 배경의 작품으로 탈바꿈했는데, 중요한 점은 그렇게 시대상이 점프를 해도 작품이 다루는 소재가 낡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악의적인 제의를 행하는 해동밀교 교주의 등장으로 시작되는 애니메이션 <퇴마록>은 아스타로트라 불리는 악마와 맞선 박 신부의 구마 의식을 이어가며 작품의 세계관을 브리핑하듯 시작한다. 1990년대 세기말 감성을 넘어서 현대에서도 통할 만한 오락물의 자질을 갖췄기에 충분히 설득되는 인상이다. 무엇보다도 작품에 어울리는 표현 방식의 해법을 고안하고 적용해야 하는 애니메이션의 기술적 완성도가 높아 보인다는 건 <퇴마록>이 거둔 최상의 성취일 것이다.
<레드슈즈>(2019)와 <유미의 세포들 더 무비>(2024)로 성공적인 결과물을 선보인 바 있는 애니메이션 제작사 로커스 스튜디오가 제작한 <퇴마록>은 음영의 깊이를 살려 실물감을 더하는 실사 텍스처 방식이 아니라 만화적인 외곽선과 만화적인 감성이 두드러지는 카툰 렌더링을 사용했다. 그 덕분에 만화적 비현실성이 되레 <퇴마록>의 리얼리티를 강화하는 톤 앤 매너로서 적절해 보인다. 정교한 묘사에 회화적인 색채감을 입힌 배경을 입체감 있는 3차원(3D)으로 구현했지만 일부 액션 시퀀스에서는 인물의 동작을 더 도드라지게 구현하도록 평면적인 2차원(2D) 프레임을 삽입했다. 동시에 액션 시퀀스에서는 단일 프레임의 일부 묘사를 왜곡하거나 확대해 속도감을 높이는 고전적인 만화 기법 ‘스미어 프레임’을 적용해 역동적인 연출을 시도했다. 일찍이 마련된 독자적인 세계관이 애니메이션만의 개성과 잘 맞물리면서, 보다 현대적인 결과물로 완성되었다.
‘The Beginning’이라는 부제가 달린 영문 제목
<퇴마록>은 한국적이면서도 이국적이며 오컬트와 판타지, 무협 장르가 뒤엉킨 하이브리드 세계관이라는 점에서 복합적이면서도 독자적이다. 로컬이지만 글로벌이다. 한국적인 무속신앙이나 일본의 밀교, 기독교의 구마 의식이나 힌두교, 인도•이집트 신화, 무협 소설의 무공이나 도술 등 국적과 장르를 망라하고 다양한 초자연적 현상을 잡다하게 버무린다. 속되게 말하면 족보 없는 콜라주(Collage) 같기도 하지만 혼재된 요소들이 다양한 캐릭터의 개성이나 개별적인 사연과 맞붙어 흥미롭게 정리되고 연이어 전개되는 요량이 상당하다. 단행본 20여 권에 달하는 원작의 방대한 서사 분량도 충분하다. 그런 면에서는 영화가 아닌 시리즈로서 포맷을 유지했다면 어떠했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처음으로 애니메이션 제작 계획을 발표했던 2020년 당시의 <퇴마록>은 극장 개봉 영화가 아니라 24화 분량의 시리즈물로 기획되었다. 현재 극장 개봉 애니메이션이 된 <퇴마록>은 기존 기획안에서 4화까지의 에피소드에 해당하는 스토리 분량을 러닝타임에 맞춰 각색하고 편집한 버전에 가깝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퇴마록>은 개별 작품의 성취를 떠나 20세기 말에 찾아온 슈퍼 IP를 동시대로 소환하고 그 가치를 환기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도모할 여지를 만드는 입구처럼 보인다. 원작 소설은 분명 원 소스 멀티 유스(One Source Multi-Use)나 트랜스미디어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원천 소스에 가깝다. 대중성은 일찍이 증명되었지만 웹툰과 웹소설을 영화나 드라마로, 혹은 그 반대로도 기획하는 작금의 콘텐츠 순환 구조 안에서 <퇴마록>은 실로 쓸모가 많은 매물처럼 보인다. 물론 당장 극장에서의 흥행 여부에 따라 판단은 유보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K-오컬트라는 단어가 대중적으로 통용되는 지금, 새로운 <퇴마록>이란 분명 시의적절한 제목이다. 그러므로 그 어느 때보다 흥미로운 사건이 필요한 극장에서 목도하고 싶다. 일찍이 20세기에 도래한 잠재력이 K-오컬트의 가능성을 촉진하는 주문이 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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