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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인 역사가 만든 두 세계
<두 사람>

정지혜(영화평론가)

구체적인 사람의 역사, 매혹적 개인에 기대어 그의 세계를 발견해 나가고 그를 통해 세계를 탐문하는 인물 다큐멘터리의 운명은 결국 어떤 사람과 만날 것인가, 만난 그 사람을 어떤 방식으로 찍을 것인가에 달렸다. 장편 다큐멘터리 <두 사람>(2025)의 반박지은 감독은 영화의 시작에서 이 영화의 운명과 향방을 결정한 순간을 짧게 회고한다. 어느 전시회에서 본 사진 속 두 사람에게 끌려 그들을 찾아가 영화 찍기를 청했노라고. 사진 속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나란히 서서 카메라를 응시한다. 그들은 나치 치하에서 국가 폭력으로 희생된 동성애자들을 기리는 베를린의 추모비 앞에 서 있다. <두 사람>의 주인공, 이수현과 김인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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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성소수자 부부의 지금, 이곳

<두 사람>은 이수현, 김인선의 삶과 사랑에 관한 영화다. 이들은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는 70대의 레즈비언 커플이자 인생의 동반자이며 공인된 부부다. 독일에서 살고 있는 자신이 이방인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 있는 감독은 직관적으로 사진 속 두 사람에게 이끌렸으리라. 다르고 낯선 존재로서 느끼는 소외감 앞에서, 그러한 감각을 발생시키고 지속하게 만드는 현실적 조건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에 균열을 내 온 앞서간 사람들을 찾고 싶을 때가 있다. 그리하여 영화는 두 사람의 현재 삶에 동행하길 청한다. 범속의 일상을 신실히 일궈 나가는 이들의 소소한 일상을 가까이에서 기록하며 그 사이사이 그들이 지나온 삶의 경로와 궤적을 청해 듣는다. 영화는 얼마간의 사진과 편지 등 간단한 푸티지(Footage)를 사용해 두 사람의 과거 모습을 볼 수 있게 하지만, 그것은 과거사를 본격적으로 되밟으려는 추적의 시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들 삶의 현재를 충실히 보여주는 데 집중하는 과정의 일환일 뿐이다. 좀처럼 공개적으로 가시화되지 않는 노년의 성소수자 부부를 지금, 이곳에서 만난다는 것, 그들이 지금, 이곳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 자명한 사실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영화에는 힘이 붙는다.

삶의 주도권을 향한 이주와 정주의 역사

30년 이상을 함께해 온 그들의 지난 세월은 그 자체로 성소수자의 생생한 역사이자 자취다. 또한 두 사람은 한국에서 독일로 떠나온 이민 당사자로서 낯선 땅에서 이방인으로서 정주의 방식을 모색해야 하는 디아스포라(Diaspora)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들은 한껏 가까이 다가온 죽음의 그림자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아픈 몸을 돌보는 법을 구체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노년의 여성들이다. 성소수자, 디아스포라, 여성이라는 겹겹의 정체성이야말로 지금까지 두 사람의 삶을 이뤄 온 중요한 토대이자 실존적 질문이며 생의 좌표다.

그들의 이주와 정착의 역사는 한국인의 해외 이주사와 긴밀히 맞물려 있다. 1970년대 한국의 수많은 여성은 일자리를 찾아 자의 반, 타의 반 독일로 이주했다. 이들도 그 흐름 속에 있었다. 이때의 이주는 태어나고 자란 땅에서 다른 길의 가능성이 좀처럼 보이지 않을 때, 주체적 시민으로서의 자기 자리가 요원할 때 가까스로 찾아낸 외부로 나가는 문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존재와 이력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고자 하는 일종의 자기 삭제와 자기 재건의 열망이 반영된 일이기도 할 것이다. 독일로 온 수현은 1975년 일자리를 찾아 함부르크에서 베를린으로 이주해 정착했다. 인선은 자신을 낳은 뒤 한국에서 독일로 떠난 엄마의 초청으로 1972년 독일로 왔고 파독 광부와 결혼했다. 그런 수현과 인선은 1980년대 재독여신도회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들에게 진정 새로운 삶의 문이 열린 것이다. 누구의 강요도 우발적 선택도 아닌 진지하고 진중한 자기 선택이 만들어낸 결과이며 자기 삶의 주도권을 그러쥐고 행복해질 권리를 향해 나아간 용감한 한 발, 전진이다.

겹겹의 교차하는 정체성 속에서

이러한 주체적 선택과 달리, 성소수자를 향한 오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의 역사가 이들의 삶을 규율하고 통제하기도 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감독은 수현에게 인선과 손잡고 다니는 것을 딱 한 번밖에 촬영하지 못했다고 하자, 수현은 다음과 같은 요지로 말한다. “눈에 띄게 손을 잡거나 특별난 행동을 하지 않는다. 괜히 특별난 행동으로 해를 입을 수 있지 않겠느냐”라고. 그러면서 덧붙인 혼잣말, “왜 그랬을까?” 인선도 비슷한 맥락의 말을 꺼낸 적이 있다. “나의 정체성이 한국보다는 독일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떤 문제가 생기면 한국적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베를린 한인사회에서 내가 여자와 사는 것을 한국까지 가서 공개했다고 말할 것 같고.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게 아닌지.” 그러면서 인선도 덧붙인다. “언젠가는 이 장이 열리지 않을까.” 이들의 혼잣말과 바람은 동성 연인과 함께 사는 것과는 또 다르게 소속된 공동체, 사회, 가족에게 자기의 성적 지향과 정체성이 드러나고 의문과 질문에 부쳐지는 건 여전히 두렵고 조심스럽다는 것을 방증한다. 구설에 오를까 싶어 자신을 단속할 뿐만 아니라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피해와 위협까지 입을 수도 있는 문제일 것이다. 이런 마음이 자연스럽게 일어났을 리 없다. 성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알게 모르게 겪어 온 불편부당함이 70대가 된 지금까지도 그들의 행동과 의식의 기저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차별의 고리는 질기고, 차별은 줄기차고 끈질기다.

여기에 더해 ‘한국적’으로 사고를 하게 된다는 인선의 말에서 성소수자이자 이민자로서의 정체성이 교차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떠나온 곳과 완전히 절연한 채 정체성이 만들어지고 인식이 작동하는 게 아니라 떠나온 곳과 정주한 곳 모두의 것을 얼마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이중의 교차하는 정체성의 상태다. 수현이 한국의 가족들을 신경 쓰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이민자 여성이 겪어야 할 차별 또한 그들의 경험 속에 생생히 살아 있다. 독일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인선은 당시 환자들이 여지없이 추근거리던 것을 기억한다. 처음에는 그저 친절한 환자들이구나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고서야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 추근거림은 결코 독일 간호사들에게는 하지 않는 행동이었음을 말이다. 디아스포라, 한국인 여성이라는 조건이 만들어낸 또 다른 차별의 작동이다.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목소리가 되기까지

그런 과정을 겪어 온 두 사람은 꿋꿋하게 자기 정체성을 더더욱 강화해 나가고 이 문제를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공론화한다. 차별이 불러일으킨 소외와 고립의 감각에 주눅 들지 않고 이웃과 교류하고, 한국과 독일을 오가며 성소수자 축제에 참여하며, 강연장에서 성소수자로서 목소리 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뿐인가. 이종문화 간 호스피스를 위한 단체를 설립해 이민자들이 서로를 돌보고 생의 끝에서 외롭지 않게 죽음에 이를 수 있도록 교육하고, 지지하고, 격려한다. 돌봄 의제는 이민자와 이종문화라는 처지와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층 까다로운 문제다. 이것은 수현과 인선 두 사람에게도 해당한다. 1991년 임대차계약서를 함께 쓴 이후로 31년 만인 2022년 두 사람이 베를린에서 혼인신고를 한 것도 그래서다. 1990년부터 자타공인 커플로 함께 살아왔으니 특별히 법적인 공인이 필요하겠는가 싶어 생활동반자로 등록하지 않아 왔다. 하지만 인선이 수술을 하게 되자 가족이 아닌 수현이 보호자로서 자격과 권리를 주장할 수 없음을 체감하고 결혼이라는 법적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사회적, 제도적으로 공인된 절차가 관계의 안정과 지속, 사랑의 보호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가를 다시 한번 알 수 있다.(이와 유사한 경우로 <불온한 당신>(2017, 이영 감독)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영화 속 일본의 한 레즈비언 커플은 동일본 대지진 이후 주변에 커밍아웃을 하고 자신들의 관계를 공인받는다. 자연재해 상황에서 가족이 아니면 파트너의 생존 여부조차 확인할 권리가 없다는 현실의 벽 앞에서 내린 결단이다. 성소수자가 사회적 참사나 재해 앞에서 얼마나 취약하고 위태로우며 보호받지 못하는가를 정확히 짚어준 사례다.)

가시화된 존재, 사랑, 그리하여 두 사람이어라

수현, 인선과 동행하는 영화 <두 사람>을 통해 비가시화되어 온 존재들을 전면화하고 정면으로 마주하는 반가운 경험 못지않게 기쁘게 발견하게 되는 일이 있다. 이것이 엄연히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마치 두 사람을 하나의 덩어리, 한 마음으로 그리려 할 때가 있다. <두 사람>은 낭만주의적 로맨스의 환상에 편입하거나 그것을 재생산하지 않는다. 수현과 인선 두 사람, 그들은 각각의 한 사람이다. 혼자라는 감각을 잃지 않고, 힘들지만 혼자의 시간을 감당한다. 함께 퀴어 퍼레이드에 가보자는 수현의 청을 듣고 인선은 “나한테 지금 제일 중요한 건 글이에요”라며 거절한다. 영화는 이때 수현, 인선 누구에게도 너무 냉담한 게 아니냐고, 정말 서운하지 않으냐고 묻지 않는다. 수현은 인선의 거절에 굴하지 않고 거리 시위에 나가고, 인선은 원고 작업에 매진한다. 그저 카메라는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수현을 따라나서고, 인선 곁에 있다. “자신을 위한 시간 없이는 자원봉사를 평생 할 수 없다”는 인선의 말은 이들 사랑을 지속시키는 묘책으로도 유효해 보인다. 사랑과 돌봄을 실천하는 데 있어 친밀한 당신과의 연결 못지않게 자기 자신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깨달음은 그렇게 온다. 구체적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만들어낸 두 세계는 그렇게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