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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울 형편’이 말해주는 현실
장민준 감독 <딜리버리>
- 글
- 김형석(영화평론가)
- 사진
- (주)마노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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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민준 감독 <딜리버리>
어느 부자 부부가 있다. 풍요로운 그들의 삶에 단 하나 부족한 점이 있다면, 아기가 안 생긴다는 것. 그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아이를 가지려 한다. 또 다른 부부는 가난하다. 그들에겐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긴다. 아기가 생겨 버린 것. 여기서 두 쌍의 부부는 우연히 만나게 되고, ‘아기’라는 서로의 결핍과 잉여를 교환하기로 한다.
<딜리버리>는 단순하게 보이면서도 한 걸음 다가가 들여다보면 의외로 여러 겹이 발견되는 영화다. 돈 많은 불임 중년 부부와 원치 않은 임신을 한 가난한 젊은 부부라는 상반된 인물을 축으로, 명확한 갈등과 뚜렷한 기승전결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구조적으로는 단순하다. 하지만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이 영화는 동시대의 동화 같고, 한편으론 사회 계급에 기반한 풍자극처럼 다가오며, 부부 문제를 담고 있는 로맨틱 코미디 혹은 냉혹한 자본주의를 다룬 교훈극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딜리버리>는 최근 신인 감독들의 장편 데뷔작 트렌드에서 조금은 벗어난다. 일반적으로 첫 장편을 준비하는 감독들은 상업적으로 기획된 장르영화나, 자신의 이야기와 테마가 투영된 작가주의 저예산 영화를 선택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딜리버리>는 그 가운데에 있다. 이 영화는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리얼리즘 영화는 아니지만, 장르영화로 부를 만큼 관습적이지도 않다. ‘대리모’나 ‘입양’ 같은 다소 심각한 테마를 크게 힘주지 않고 비틀면서, 한편으론 <기생충>(봉준호, 2019)의 문제 의식과 일맥상통하는 일종의 소동극이다. ‘배달’과 ‘출산’이라는 의미를 지닌 ‘delivery’를 제목으로 삼은 영화는, 이 단어의 중의성만큼 다중적인 톤으로 관객에게 다가가는 영화다.
영화가 시작되면 귀남(김영민)은 동료 산부인과 의사 근호(박성일)에게 진료 결과를 듣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무정자증’인 귀남. 고환에서 직접 정자를 채취하는 TESE라는 시술 방식이 있지만 귀남은 거부한다. 대신 ‘거짓말’을 선택한다. 그는 아내 우희(권소현)에게 문제가 있어서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고 말하고 우희는 자책한다. 입양을 해야 할까? 그럴 순 없다. 우희의 아버지이자 귀남의 장인인 태식(동방우)은 ‘대를 이어야’, 즉 생물학적 출산을 해야 유산을 주겠다는 강경한 입장이다. 우희는 임신한 척하고 어디선가 갓난아기를 데려와 아버지를 속이는 걸 남편에게 제안한다.
미자(권소현. 우희 역의 권소현과 동명이인이다)와 달수(강태우)는 산동네에 사는 가난한 백수 부부다. 조심해야 함에도 미자는 임신을 하고, 키울 자신이 없는 부부는 중절 수술을 결정한다. 이때 만난 의사가 바로 귀남. 그렇게 인연을 맺게 된 귀남-우희, 달수-미자 부부는 은밀한 거래를 한다. 미자는 임신 기간 동안 귀남-우희 부부가 제공하는 편안한 공간에 머물고, 우희는 임신을 가장한다. 대신 아이를 낳으면 귀남-우희 부부에게 넘기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다. 달수-미자 부부는 수락하고, 그들은 산동네의 원룸에서 내려와 숲세권의 풀옵션 아파트로 들어간다.
마치 코미디처럼 전개되지만, 이 거래는 잔인하다. 뱃속의 아기를 거래하는 과정은, 이 영화가 겨냥하는 비판적 지점을 명확히 드러낸다. 우희는 달수-미자 부부에게 아기를 넘겨받는 조건에 대한 계약서를 건넨다. 계약서 앞에 두고 어리둥절한 부부 앞에서 우희는 말한다. “건물주가 되셨다고 생각하세요.” 자궁이라는 ‘아기 집’을 소유한 미자가 그곳을 빌려주는 조건으로, 일종의 ‘임대차 계약서’를 쓰는 거라는 얘기다. 여기서 ‘아기’는 두 쌍의 부부에게 애정을 쏟는 대상이 아니라 더 많은 자본을 취득하기 위한 도구이자 수단이 된다. 귀남과 우희는 혈연적 자손이 있어야 유산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아기를 가져오는 데 적잖은 돈을 ‘투자’한다. 반면 미자는 이번 기회를 통해 인생 역전을 하려 한다. 그래서 계약 사항보다 더 많은 돈을 ‘뜯어내려’ 하고, 백수 근성에 찌든 남편 달수에겐 나가서 돈을 벌어 오라고 강요한다. 아기의 출산(딜리버리)을 밑천 삼아 계급 상승을 노리는 셈이며, 자신의 미래를 매주 로또에 의존했던 달수는 택배(딜리버리) 일을 시작한다.
하지만 문제가 생긴다. 진료 중 귀남은 아기에게 기형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출산 후 문제가 없으면 계약대로 진행하지만 만약 ‘하자’가 있는 아이라면 데려가지 않겠다고 미자에게 말한다. 이 장면은 영화 초반부의 중고 거래 신을 떠올리게 한다. 미자는 놀이터에서 한정판 운동화를 팔고 있는데, ‘짝퉁’을 비싸게 팔려고 하다가 손님에게 거부당한다. 이 신은 이후 미자가 처할 상황에 대한 예시인 셈인데, 그는 ‘정상’인 아이를 낳으면 그 대가를 받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그 어떤 것도 얻지 못한다. 생명은 상품처럼 취급되고, 하층 계급의 생산자인 미자는 ‘정품’을 납품해야 한다. 심지어 달수는 미자에게, 아이를 더 낳아서 계속 이런 식의 거래로 돈을 벌자는 철없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진정 비정한 세상이며, 아기를 돈의 가치에서 사고 파는 비인간적 자본주의의 현실이다.
저출산 시대 한국 사회의 은유흥미로운 건 감독이 조절하는 영화의 톤이다. <딜리버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첨예한 현실의 문제와 코미디 톤의 장르적 분위기 사이를 진동하면서 전개된다. 귀남-우희 부부가 속해 있는 상류층의 삶을 보여줄 때, 이 영화는 (특히 권소현, 김영민, 동방우 등의 연기를 통해) 심각한 드라마보다는 가벼운 코미디 터치를 보여준다. 반면 달수-미자의 신으로 넘어오면 그들이 겪는 현실적 갈등과 그들이 느끼는 소외감과 좌절이 드러난다. 이처럼 상반된 톤이 교차되는 영화라 할지라도 일반적으로 후반부에 가면 한쪽으로 쏠리기 마련이지만, <딜리버리>는 지나치게 심각한 감정을 드러내지도, 그렇다고 해서 심각한 현실을 필요 이상의 슈가 코팅으로 감싸지도 않는다. 달수가 귀남-우희의 집에 쳐들어와 아기를 빼앗아 가려는 장면조차, 사실 매우 처절한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코미디 요소를 결합시켜 사건을 해결한다.
이것은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장민준 감독의 세계관이다. 채플린의 말처럼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이 영화는 아기를 팔아야 하는 비극적 상황을 가까이 보면서, 동시에 조금 떨어져 그러한 거래가 벌어지는 광경을 관찰한다. <딜리버리>에서 장민준 감독은 적절히 장르적 관습을 이용하는 유연성을 보이면서도, 관객이 필요 이상으로 몰입하는 걸 경계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모성애에 매달리지 않는다. 미자는 자신이 낳은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 하는 일종의 ‘대리모’라 할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영화 속에서 대리모 캐릭터는 출산 후 자신의 핏줄에 대한 애착으로 한바탕 ‘모성의 전쟁’을 벌이며 이 대목은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되기 마련이다. 입양을 소재로 한 영화들도 입양아가 부모(주로 엄마)를 찾아가 그들이 만나는 장면에서 감정적 절정을 맞이하곤 한다. 하지만 <딜리버리>는 시종일관 유지되었던 가벼운 코미디의 톤이 신파 멜로드라마로 변질되는 걸 원치 않는다.
이 영화에서 모성애의 자리를 차지하는 건 책임감이다. 미자는 자신의 아기가 기형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혹시 그런 상황이 일어나더라도 자신의 아기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한다. 달수도 마찬가지다. 영화의 중심적 사건인 ‘아기의 거래’에서 사실 그는 방관자의 입장에 서 있었지만, 거래가 끝난 후 생길 큰돈에만 관심 있었지만, 갓난아기를 품에 안는 경험을 한 후 그에겐 ‘아버지’라는 책임감이 조금씩 싹 트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이 영화의 발단이었던 비인간적인 자본주의의 현실이 조금씩 무너진다. 달수는 금전적 대가 대신 자신의 아기를 원하며 빼앗아 온다. 그럼으로써 귀남-우희 부부는 유산 상속의 기회를 상실한다. 아기를 수단으로 돈을 벌려 했던 부부들의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간 셈이다. (그래도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희는 자신이 아닌 남편에게 불임의 이유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시술을 통한다면 귀남-우희 부부도 아기를 가질 수도 있게 되었다.)
<딜리버리>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 과정이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 대한 메타포다. 영화에선 아기를 거래한다는 극단적 사건으로 상징화되었지만, 그 기저엔 ‘키울 형편’이라는 표현으로 대변되는 현실이 있다. (<기생충>의 저택을 연상시키는) 고지대의 좋은 집에 사는 부유한 부부와, 그보다 더 높은 지역의 산동네에 살고 있는 가난한 부부. 비슷한 고도에 살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한쪽은 돈만 있고 아이는 없으며, 한쪽은 아이가 있어도 키울 돈이 없다. 영화는 그 틈새에 균열을 내면서 우리의 상황을 새삼 돌아보게 만들며, 관객에게 여러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그러면서 흥미롭게도 이 영화는 이른바 ‘저출산 시대’에 접어든 한국 사회의 모습을 투영한다. 아기를 포기해야 가난을 극복할 수 있는 달수-미자 부부의 서글픈 아이러니는 어쩌면 우리의 현실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영화의 발걸음은 예상 가능하면서도 약간은 의외의 방향으로 향한다. 달수는 딸 다미(이다은)와 함께 살아간다. 택배 트럭 조수석에 앉은, 똑 부러졌던 아내 미자를 연상시키는 똑똑한 딸을 바라보는 달수는 어디론가 떠난 아내를 그리워한다. 해피 엔딩도 새드 엔딩도 아닌 <딜리버리>의 결말은, 그럼에도 묘한 희망을 품게 한다. 이것은 분만실에서 잠깐 함께 했던 달수-미자-다미의 세 가족이 언젠가는 회복될 수 있을 거라는 소망이기도 하며, 창밖에 내리는 하얀 눈의 포근한 느낌과 문 여닫는 소리는 어쩌면 이 영화가 해피 엔딩 쪽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이미지다. 아직은 가난하지만, 그래도 행복하길. <딜리버리>는 어쩌면 가난한 사람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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