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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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Record

모성에서 건진 모녀

한국영화 속 여성 캐릭터

남다은(영화평론가)

History Record는 인물, 배경, 상황 등 다양한 키워드를 주제로 한국영화를
다각도로 조망해 보는 코너다.
이번 주제는 한국영화 속 ‘여성’으로
모녀의 서사를 다뤘다.


한국영화 속 엄마와 딸의 이야기는 대개 유사한 전개와 캐릭터, 그리고 결말을 취한다. 원망, 분노, 슬픔, 후회로 점철된 상투와 신파는 불가피한 정념이다. 대중영화로서 서사의 혁신보다는 멜로드라마의 감상을 공략한 결과지만, 애초 가부장제 속 모녀라는 주제 자체가 상상력이 마음껏 뛰놀기 어려운 영역이기도 하다. 평론의 영역에서 여성 캐릭터의 변화된 면모를 분석 대상으로 삼을 때도 모녀 서사는 딱히 새롭게 대면할 화두로 여겨지지 않는 편이다. 그것이 혈연 중심 제도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필연적이고 반동적인 조건 탓이 클 것이다. 다만 이 지점에서 좀 더 정확히 말할 필요가 있겠다. 그간 모녀는 영화 속 재현의 측면에서든, 비평의 맥락에서든 줄곧 모성 담론에 귀속된 소재로 다뤄져 왔다. “여성이 어머니로서 가지는 정신적·육체적 성질, 또는 그런 본능”(네이버 어학사전)으로 정의되는 ‘모성’이 엄마와 딸의 ‘관계’를 너무 쉽게 규정하며 다른 가능성을 일찌감치 제한하는 것이다. 그건 모성을 회의하는 이야기에서도 딱히 다르지 않다. 모성과 모녀 관계의 완전한 분리는 환상에 불과할까. 그 여부를 떠나, 모성의 늪에 빠지지 않는 엄마와 딸의 얼굴은 여전히 미지의 세계이므로 늘 궁금하다. 새삼 한국영화 속 모녀 관계의 변천사에 관심이 간 건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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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여성 감독 박남옥의 영화 <미망인>(1955)


로맨스와 욕망의 주체로 그려진
<미망인> 속 ‘어머니’

희한하게도, 어쩌면 당연하게도 모녀 서사를 내세우는 한국영화들에서 남편(아버지)은 부재한다. 설사 그가 등장한다고 해도, 병들거나 바람나서 ‘가장’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엄마와 딸의 관계는 거의 언제나 남편(아버지)의 빈자리를 딛고 서 있다. 요컨대, 한국 최초 여성 감독 박남옥의 <미망인>(1955)은 한국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어린 딸과 남겨진 이신자의 이야기다. 이신자는 자신을 연모하는 남편 친구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받으면서도 또 다른 젊은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50년대 중반 한국 멜로영화 속 여성들은 도덕적 굴레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경향을 보이는데, 그중 이신자의 캐릭터는 단연 저돌적이다. 몇몇 장면이 이 여인의 무의식과 은밀한 욕망을 서늘하게 비춘다. 그가 해변에서 물놀이하는 딸을 바라보다 이웃과 우연히 대화하는 대목이 있다. 그 사이 딸이 물속으로 사라져 버리지만, 그는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영화는 엄마와 딸 쇼트 사이에 을씨년스러운 파도 쇼트를 삽입하며 모녀가 마치 별개의 시공간에 존재하듯 나열한다. 딸은 구해진다. 그러나 딸을 영원히 잃을 뻔한 엄마의 감정 동요는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이신자는 애인과 관계가 깊어지자, 딸을 옆집 홀아비에게 보내버리겠다고 말하는데, 놀랍게도 그의 말은 현실이 된다. 안타깝게도 <미망인>의 마지막 부분은 유실되어 이신자가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지 정확히 알기 어렵다. 하지만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돌이켜봐도 영화 속 전쟁 과부의 심연은 과격하다. 이 영화는 모성만이 아니라, 모녀 관계의 가능성마저 아예 도려낸 여성의 초상을 마주한다. 박남옥이 이 영화를 갓 태어난 딸을 업고 만들었다는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그가 감독이자 엄마로서 감내해야 했던 당대 상황과 그가 창조한 여성 인물의 선택이 서글프게 충돌한다. <미망인>은 박남옥의 데뷔작이자 마지막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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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육체의 고백>(감독 조긍하, 1964)


희생하고 지지하며
운명을 주고받는 모녀들

물론 이들이 전후(戰後)를 사는 모녀의 전형은 아니다. 이 장르의 뿌리는 가장이 된 엄마의 희생정신이다. 전쟁 십여 년 후를 배경으로 삼은 <육체의 고백>(감독 조긍하, 1964)에서 엄마는 부산 부둣가에서 외국인 선원들을 상대로 클럽을 운영하며, 종업원들에게 ‘대통령 엄마’로 불린다. 그의 진짜 딸들은 엄마의 직업을 양장점 사장으로 알고 있다. 엄마가 고달프게 번 돈은 철없는 딸들의 등록금과 풍족한 일상에 쓰인다. 엄마의 유일한 바람은 딸들이 상류층 남자와 결혼해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이루는 것이지만, 모든 맹목적 희생이 그렇듯 보답받지 못한다. 아니, 처벌당한다는 가혹한 표현이 어울릴 만큼 영화는 무리한 설정을 동원한다. 둘째 딸이 낯선 남자에게 강간당한 후, 엄마의 클럽 근처로 흘러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 기막힌 사실을 뒤늦게 접한 엄마와 엄마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딸이 긴 계단 위아래에 멀리 떨어져 대화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비극적인 순간이다. 엄마의 고된 육체가 가까스로 떠받치던 딸의 쾌활한 육체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엄마의 운명을 초라하게 공유한다. 결국 그는 병으로 죽고, 엄마는 자살하며, 남은 두 딸은 후회한다. 모녀의 세계에는 존재의 추락과 사라짐 외에 무엇도 남지 않는다. 이 영화는 너무도 공허하다.

1970년대에는 그 ‘엄마’의 위치에 딸들이 놓인다. <영자의 전성시대>(감독 김호선, 1975)처럼 이제 하층계급 딸들은 엄마 대신 도시로 이주해 고향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 고군분투하는 딸들의 육체적 수난기가 ‘호스티스 영화’라는 범주로 통칭 되던 시절, 다른 한편에서는 엄마 품에 싸인 여섯 살 딸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스크린에 울려 퍼진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감독 신상옥, 1978)의 중심은 엄마의 애정사를 관찰하는 옥희의 천진무구한 시선이다. <미망인>의 딸과 달리, 옥희는 어른들의 서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화자이자, 사랑방 손님 아저씨와 엄마를 중계하는 영리한 메신저다. 그렇다고 영화가 옥희의 소원을 성취해 주는 건 아니다.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마지막에 나온다. 언덕 위에서 엄마와 옥희는 아저씨를 태운 기차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본다. 남겨진 둘의 모습이 쓸쓸하면서도 묘하게 단단하다. 남편(아버지)의 빈자리보다 동반자 모녀의 형상에 더 눈길이 가는 장면이라고 해야 할까. 이 결말은 실패한 연애담이지만, 아직은 착취와 희생의 그늘 없이 어딘가로 열린 모녀의 서론이기도 하다.

한국영화사에서 희생하는 엄마 다른 편에는 복수하는 엄마가 있다. <어미>(감독 박철수, 1985)로 영화계에 복귀한 배우 윤여정이 바로 그런 엄마로 나온다. 이 엄마는 일단 전통적인 여성상과 거리가 멀다. 모녀 서사의 뼈대가 되는 빈곤한 삶의 조건도 이 영화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는 대학입시를 앞둔 딸을 뒷바라지하는 열혈 엄마지만,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하며 담배를 즐기고 화가 애인을 둔 자의식 강한 여성이기도 하다. 딸이 인신매매단에 납치된 후에도, 만신창이가 된 딸을 혼자 힘으로 찾은 뒤에도. 엄마는 광적으로 절규하지 않는다. 엄마가 각종 도구를 동원해 가해자들을 하나하나 처단하는 과정, 자수한 다음 고요히 담배 한 대를 무는 마지막 모습은 우아하기까지 하다. 아버지나 공권력의 책임을 홀로 떠안은 엄마의 자존감은 근사하지만, 그 복수가 개운하지는 않다. 영화가 유학파 엄마의 꼿꼿하고 모던한 자태를 강조하는 동안, 딸에게서는 언어를 박탈하고 그의 육체를 완전히 무력한 상태로 스크린에 전시하는 데 어떤 망설임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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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요네즈>, 출처 (주)시네마서비스


모녀의 다른 이름, 애증

희생이나 복수 같은 무거운 임무가 아니라면 모녀는 어떤 화두를 공유할 수 있을까. 엄마와 딸은 싸운다. <마요네즈>(감독 윤인호, 1999)에는 당대 ‘국민 어머니’ 김혜자와 ‘국민 요정’ 최진실이 그 호칭에 어긋나는 모녀로 분해 시종일관 다툰다. 혼자 된 엄마는 지난 세월을 보상받고 싶고, 자기 삶을 꾸린 딸은 엄마의 기대가 버겁다. 엄마는 해묵은 마음을 딸에게만 폭풍우처럼 쏟아내고 딸은 엄마의 욕망에 미움과 수치심, 원망과 연민을 한꺼번에 느낀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딸은 엄마에게서 미래의 자신을 본다. <마요네즈> 역시 모녀 관계의 토대를 해결도 단절도 요원해 보이는 이 구도에 둔다. 지독하고 질긴 애증 끝에는 어김없이 엄마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눈꽃>(감독 박철수, 1992), <가족의 탄생>(감독 김태용, 2006), <애자>(감독 정기훈, 2009) 등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모녀 서사의 퇴로 없는 감정을 주시하는 길보다 차라리 죽음을 감당하는 일을 택한다. 이제 딸의 회한에 찬, 더러는 미화된 회고가 시작될 것이다. 엄마와 딸은 끝내 서로에게서 감정적으로 독립하지 못한다.

모녀의 이야기가 뒤엉키지 않고도 서로의 현재를 긍정하는 일은, 아니, 그마저 어렵다면 그저 응시하는 일은 이토록 어려울까. 전도연이 엄마와 딸 모두를 연기하는 <인어공주>(감독 박흥식, 2004)에서는 딸이 과거로 건너가 자신과 똑같이 생긴 젊은 날의 엄마를 만난다. 엄마는 억척스럽기만 한 아줌마가 아니라, 딸에게 ‘언니’라고 부르는 해맑은 소녀다. 딸은 엄마가 단 한 번도 꺼낸 적 없는 풋풋하고 생기로운 시절로 들어가 그 시간에 자신의 이야기 또한 새겨본다. 우리는 여기서 엄마의 플래시백도, 딸의 회상도 아닌, 두 여성이 함께 엮어낸 또 다른 세계를 본다. 이것은 딸이 꾼 꿈 혹은 환상일 뿐일까. 그런 꿈, 환상이라면 끌어안아 마땅하다. 다시 현재로 돌아온 영화에서 엄마는 여전히 강퍅한 일상을 살아가고 딸의 상황도 나아진 바 없다. 그러나 여기, 무엇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엄마가 죽지 않아도 모녀 서사는 버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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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어공주>, 출처 CJ E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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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윤희에게>, 출처 (주)리틀빅픽쳐스

엄마의 잊힌 시간을 깨우는 딸은 <윤희에게>(감독 임대형, 2019)에도 있다. 어느 날 일본에서 온 한 통의 편지에서 엄마와 딸의 여정이 시작된다. 엄마의 첫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이지만, 이 영화는 애태우지 않는다. 고심하고 기다리고 몰래 지켜보고 마침내 마주해서도 섣불리 다가서지 않고 미소 짓는다. 인물들 사이의 거리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감정은 충분히 교류될 수 있다. <윤희에게>는 모녀 관계도 그 믿음을 바탕으로 재현한다. 딸이 엄마의 과거 문을 두드리고 엄마가 딸의 현재에 말을 거는 방식과 태도는 영화가 고수하는 거리감을 반영하고 존중한다. 그렇게 엄마의 이야기와 딸의 이야기는 느슨하게 교차하고 평온하게 병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관계의 거리는 무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의 경우라면 애초 성립할 수 없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감독 김세인, 2019)는 그 어떤 모녀의 세계보다 무섭고 징그럽다. 모성에 저항하는 엄마의 폭력성과 욕망, 모성을 갈구하는 딸의 결핍감과 인정욕구는 한계 없이 질주한다. 상대와 자신을 향한 연민과 혐오만 매섭게 몰아치는 이곳에 신파가 들어설 틈은 없다. 정글의 맹수처럼 서로를 할퀴는 엄마와 딸을 보고 있자면 그간 일련의 영화 속에서 접한 모녀의 각종 갈등은 귀여울 지경이다. 감독은 모녀 각자의 감정을 우회 없이, 무엇보다 화해나 타협 가능성도 남기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인다. 이런 사례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결말에서 딸이 마침내 집을 떠나는 순간, 영화에는 안도가 아닌, 날카로운 질문의 불씨가 살아남는다. 모녀 관계의 시작도 끝도 충돌도 화해도 아닌 이 순간은 대체 서사의 어디쯤이라고 해야 할까.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엄마와 딸의 저 잔혹한 전투 이후에도 이들의 이야기가 쉽게 마무리될 수 없다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물음들을 접지 말아야 한다고 강변하는 것 같다. 김지영(<82년생 김지영>(감독 김도영, 2019))이 엄마에게 빙의되어 중얼대던 한 맺힌 음성에는 그저 슬픔이 담기지만, 이 섬뜩한 엔딩에는 모녀 서사를 감상의 지평에서 진흙탕 대지로 끌어내리려는 의지가 끓는다.